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뽈입니다 Apr 18. 2020

자기만의 방

어느 생존형 미니멀리스트의 소회

2020년 4월 17일 금요일 

날씨 : 비 오고 흐림

기록자 : 뽈


미니멀리스트다, 나는.
(혹여 혼자만의 착각인가 해서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봐 온 절친한 이에게 물어 확인받았다. 키읔.)

어떤 결심 혹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느 날 불현듯 무소유를 깨단했다거나 비워냄이란 얼마나 삶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며 단순함이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유의 예찬에 감복해서 단순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오래전부터 알았다. 비워낼 것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법을. 그러니까,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된'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야 했고,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스스로가 세간에서 말하는 미니멀리스트에 가깝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1.


나이보다 이사를 많이 다녔다(로 시작하려 했는데 이젠 이사 횟수가 나이보다 적네...또르르).
경기도, 서울, 부산.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각각 다른 지역에 소재한다. 잠시 거쳐 간 학교들까지 합치면 지역은 더 늘어난다. 원거리 이사도 잦았지만 같은 지역 내에서도 거의 매년 이사를 했다.

이사와 이동에 특화한 인간은 물욕이 적다. 아니, 적어야 한다. 짐을 최소화할수록 유리하기 때문에. 짐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지 않는 것.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닌 이상 들이지 않는 법을 자연히 터득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엔 정말로 갖고 싶은 게 없다. 그래서인지 뭔가를 사달라고 떼 써본 기억이 없다. 이사를 같이하는데 어째서 맥시멀리스트가 됐는지 모를 엄마를 주로 말리는 쪽이었지. 어린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고향'과 '정착'이 전부였다.

수많은 이사 경험과 역마살 간의 상관관계는 알 수 없으나, 타의적으로 이사를 하는 일이 줄어들 무렵부턴 자의적으로 나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학기 중에 모은 돈으로 방학에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휴학하고 장기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연고가 전혀 없는 타지역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가거나 다른 나라에서 계절학기를 보내거나 별안간 제주에 귤을 따러 가거나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하거나 영국에 워킹 홀리데이를 오거나. 짐을 꾸리고 풀고 다시 싸는 일이 반복적으로 요구되는 일들이었지만 어려웠던 적은 없다. 짐을 가볍고 적게 빨리 싸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장기여행자의 배낭


8킬로그램짜리 38리터 백팩 하나로 열 달을 여행했고, 어디로 이사하든 짐은 상자 서너 개로 간추려졌다. 2년 동안 살 런던에 올 땐 28인치 캐리어와 배낭 하나 메고 왔다. 한국에 남겨둔 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른 해 동안의 모든 허물이 6호 사이즈 우체국 택배 상자 다섯 짝 안에 꾸려져 있다. 출국 전날 그 다섯 개의 상자를 보면서 뿌듯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참으로, 지나칠 정도로 컴팩트한 삶이구나 싶어서.


2.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방이란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하여 벽 따위로 막아 만든 칸’을 뜻한다는데, 나는 그 벽 따위로 막힌 칸을 가져본 일이 드물다. '내 방'을 가져본 경험이 적다. 유년 시절에는 사촌 동생 둘과 한 방을 써야 했고, 소년 시절에는 엄마와 방을 쓰거나 아빠까지 셋이서 공간을 나눠 써야 하는 작은 집에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는 방이 생겼지만, 맥시멀리스트 엄마의 손길이 너무도 구석구석 닿아있었다. 나는 읽지도 않는 부동산과 재테크 관련 도서를 비롯한 부모님의 온갖 서류가 처박힌 책장이 있고 나는 보지도 않는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있고 엄마가 어딘가 다녀올 때마다 데려온 괴상한 얼굴의 인형들과 기념품이 꾸역꾸역 둘러앉아 있는 작은 공간엔 내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 방에 있는 것 중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다름 아닌 나였기에. 나는 엄마가 고른 침대 위에 누워 엄마가 고른 이불을 덮고 잤다. 그것은 내 방이라기보다, 엄마에게 잠깐 빌린 방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고. 만질 수 없는 무형적인 것들에 관한 취향을 더욱 견고히 세우기 시작한 것이. 물성을 가지지 않는 것들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니까.

서울로 돌아온 건 대학교 졸업 직후다. 보증금 한 푼 없이 무작정 상경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집에서 그 집의 주인과 함께 살아야 했다. 돈은 없어도 독립을 향한 열망은 커서 짐을 늘리는 일은 계속 삼갔다. 언제든 나가야 하니까. 서울에 사는 3년 동안 이사를 4번 했고, 한 번 독립에 성공할 뻔했으나 한 달 만에 무산됐다. 다시 아빠 밑으로 기어들어갈 수밖에. 그 집에서 벽으로 막힌 칸이라곤 화장실이 전부였으므로 우리는 소년 시절처럼 공간을 함께 썼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나는 서른이고 아빠는 환갑이라는 것. 애틋함이 괴로움으로 변하는 시간이 우리 사이를 통과했다는 것.


2017년의 대부분을 세들어 살았던 방. 나갈 때도 짐의 양이 동일했다. 심지어 책장과 전기장판, 스탠드는 내 것 아님

 
3.


런던의 이 방은 한국에서 계약했다. 어느 지역에서 일할 줄 알고 동쪽 변두리에 속하는 동네의 방을 덥석 물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빅 더블룸인 데 비해 저렴한 편이라는 점, 창이 두 개인 점이 맘에 들었다. 일단 한 달 살아보고 더 지낼지 말지 결정해도 된다는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나야 이사는 또 전문이니까. 짐을 가져다 두러 처음 왔던 날을 기억한다. 비가 많이 내렸다. 초행길인데 왠지 인터넷도 먹통이어서 지도 앱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엉뚱한 길로 돌아오는 동안 홀딱 젖었다. 낑낑대며 2층으로 올라왔더니 방이 생각보다도 훨씬 넓었다. 사진에서 본 큰 창이 둘, 옷장 둘, 서랍장도 둘. 이토록 많은 수납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협소한 내 짐이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아무튼 좋았다. 나무색 책상과 전구색 핀 조명이 따뜻해 보였다. 집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 그 넓은 방을 어찌 채워야 하려나 생각하다가 놀랐다. 채울 고민을 하는 날이, 오다니.  

그날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이사는 없었다. 낡았고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집이지만 지내보니 더 좋아져서 이사할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새 방은 제법 채워졌다. 침대 바로 옆 벽면에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소중한 엽서와 사진들이 붙어있고, 늦은 밤의 독서를 돕는 스탠드 조명과 어쿠스틱 기타가 세워져 있다. 그 앞 서랍장 위엔 각종 책과 위스키병, 카메라 세 대가 나란히, 오른편 창가 쪽 서랍장 위엔 턴테이블이 놓여있다. 책상엔 노트북과 외장하드, 몇몇 프린트물이 각 잡힌 채로 정돈돼 있고 스킨과 로션, 지갑과 은행 카드들 따위가 내가 정한 질서 아래 정연히 있다. 아, 그리고 이불. 새해에 이불 커버를 바꿨다. 내가 고른 이불 커버를 씌운다는 것은,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정말 이상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날 밤 커버가 바뀐 이불을 덮으면서 진짜로 실감했던 것 같다. 이곳이 나만의 방, 자기만의 방임을. 정착이란 말과 삼십 년 만에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내 방.


길었던 지난겨울을 무사히 지내고, 이리도 긴 록다운을 또 무사히 견뎌내는 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 방을 내일 떠난다. 어제 짐을 꾸렸고, 두 시간 반 만에 끝났다. 짐을 가볍고 적게 빨리 싸는 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이니까. 상자 하나와 쇼핑백 둘, 백팩 두 개와 기타 가방이 7개월간의 자취로 남았다. 사스가, 늘어난 수준도 컴팩트. 이사와 이동에 특화한 인간은 본래 떠나는 일에 미련도 크게 갖지 않는 편인데 어제는 뭐 그리 미련이 남는지 다 싼 짐을 괜히 들춰보고, 볼 것도 없는데 또 들여다보고 그랬다. 아껴두던 술을 없애려 시작한 술자리가 길어져서 기어이 병을 얻었다. 창가에 앉아 뒷마당 잔디가 검게 물들 때까지 와인과 위스키와 진을 비우는 내내 곱씹은 것은 친구의 말이었다. 너는 살짝 그거지, 생존형 미니멀리스트. 생존형 미니멀리스트는 자기만의 방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역시 맥시멀리스트는 될 수 없는 걸까. 언제까지 생존형이어야 할까. 언제까지.


뭔가 글이 너무 우울해진 느낌이라 타임랩스 영상으로 귀여운 마무리 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