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림 Apr 20. 2020

거리를 두다

거리를 두면 비로소 보이는 것


4월 20일 월요일

날씨 : 흐리고 분무기같은 비가 내리므로 우산이 필요 없음

기록자 : 야림




우리, 이제 집 이야기는 그만 쓰자


매주 월요일은 나의 일기가 공개되는 날이다. 지난 주에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눈 글은 정말이지 무거웠다.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혹은 살다가 잠시 외국으로 나온 우리네 딸들의 삶이란 게 크게 다른 곳이 없었다. 친구들과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나만 이렇게 지난하고 끈끈하다 못해 끈적거리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사는 줄만 알았는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하고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모두가 그렇다는 사실이 내 마음 한편을 다시 갑갑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집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오늘은 그냥 조금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써내려봐야지 생각했다, 여전히 어딘가 무거운 마음을 껴안고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시시하게 축하를 했다. 그리고 이제 총 30장(X4)의 사진이 모였다.


4월 19일 일요일


어제는 이 일기를 함께 공유하는 '일하는 문어들' 친구들*과 화상통화를 했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코로나시대_속_생존일기 라는 해쉬태그를 달고 일상을 기록한지 한달 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4분할로 나뉜 프레임 안에서 각자가 한칸씩 자리를 잡고 자신의 그날을 공유해왔다. 때로는 코로나를 의식한 사진을 골라 올리기도 하고, 정말 아무 생각없이 지금의 순간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 사진에 어울리는 문구를 붙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올릴 때마다, 이 일기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늘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고 앞서 말한대로 지금의 순간을 그저 꾸준히 기록한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임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별 것 아닌 일상일 수 있지만, 네명이서 매일 이야기를 나누고 지금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 바쁜 생활인의 도시를 누비면서 바쁘고 귀찮다고 가장 쉽게 밀리던 안부인사가 요즘엔 그렇게나 귀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끊을 듯 끊지 않은 채, 결국 한사람이 통화 중에 잠든 모습을 보며 깔깔대다 통화를 마쳤다.


너무 웃겨 얼굴을 온팔로 가려버린 사람과, 폭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잠든 사람과 잠들기 직전 컴컴한 방에서 통화하는 사람과 그 모습을 바라보며 훈훈하게 웃는 사람이 모인 이 작은 방이 따스했다.


* 우리는 전 직장에서 만난 사이다. 나와 고인돌이 다니던 회사에 뽈과 동그라미가 합류했고, 우리는 한팀이 되었다. 동그라미와 나는 고등학교 친구인데, 나의 추천으로 함께 일하게 됐고 이렇게 나머지 두명과도 다같이 친구가 되어서 정말 기쁘다. 참고로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시기에 퇴사해, 지금은 아무도 그 회사에 남아있지 않다ㅋ








4월 20일 월요일


어제까지는 이렇게나 시시하고도 소소한 통화를 하는데에 화상전화를 써먹었는데, 오늘은 웬걸, 온라인미팅이 2건이나 생겼다. 그것도 하나는 무척 갑작스럽게 참가요청을 받은 탓에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나는 교수님과 동기와 함께 진행하는 근황보고(라 쓰고 작업 압박이라 적겠다) 미팅, 그리고 또 하나는 최근에 시작하게 된 회사 스태프들과의 미팅이다. 온라인으로 하는 거라면 '인터넷강의'조차 싫어해서 반드시 학원에서 '실강'을 듣던 나인데, 온라인미팅이라니. 그것도 일.본.어.로.... 뭐, 결과적으로는 그럭저럭 잘 해낸 것 같다.




전반전 : 근황보고


사진을 남기지 못했지만, 교수님과 학생 두명이 함께하는 온라인 미팅이었다. 근황보고라는 이름 하에, 5월 개강 이전에 온라인 미팅에 적응해보자는 선생님의 배려로 오늘 오후 1시에 시작됐다.  (비록 2D지만) 간만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니 정말 학교가 시작된 기분이 들어서 이제부터는 정말 작업, 논문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차려야지.



집안을 모두 방수처리 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이전 일기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이, 오는 3월에 수료 청구 전시를 열어야하는 나에게 올 한해는 참 중요하다. 계획대로라면 이맘때부터 학교에서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으니 넋놓고 보낼 것이 아니라 집에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실행해야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집에다 차근히 재료를 풀어놓는 요즘이다. '집에서 종이 만들기가 가능할까?' 라는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해보니 안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요즘은 다시 작업하는 나로서의 리듬을 되찾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기 싫어서 몸을 배배 꼬고 허리가 으스러질 때까지 침대에 누워서 비벼대다가도, 기지개 한 번 켜고 작업 모드로 스위치를 전환하면 의외로 내가 무척이나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왜 항상 시작이 그렇게 어려울까?)



주방은 더 이상 요리를 위한 공간이 아니요, 베란다는 더 이상 빨래를 말리는 곳이 아닐지어다.





뽈의 영상을 보고 나도 올려보는, <집에서 이런 것 까지 한다> 시리즈 (?)






후반전 : 세운 계획을 흐트러뜨리고, 0 베이스로


불쑥 3시에 가능하다면 함께 미팅에 참가하라는 대표님의 메일을 받고 화상회의에 참여하게 됐다. 원래대로라면 4월에 학교가 시작되고부터 도쿄의 가구라자카에 있는 '테나라이도*'라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오래 사용할 좋은 도구와 물건을 만들고 전하는 일을 하는 작은 회사다. 대표 한명이 주로 작게 작게 움직이던 것을 본격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올해 대거 채용이 이뤄졌다. 내가 한국에서 해온 일과 지금의 내 관심사를 잇는 그런 일이 있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올해초 만나게 된 '테나라이도'가 딱 그런 회사였다.


화상회의에 참여한 인원은 나까지 총 7명으로, 모두 일본인이다. 면접 때 간략하게 들은 테나라이도의 계획은 아마 코로나를 기점으로 대폭 변화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이후의 계획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 여전히 좋다, 아니 어쩌면 더 좋아졌다.   


*테나라이도 공식 홈페이지는 여기



다른 분들의 얼굴을 가리느라 까만 사각형을 넣었습니다!


 

테나라이도는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도구와 물건을 소개함과 동시에 그 물건을 만드는 사람과 사용하는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되고자 한다. 때로는 온라인으로 때로는 오프라인으로. 그리고 코로나의 여파로 전세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소위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다. 이런 시기이기 때문에 테나라이도의 활동은 더욱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의든 타의든 집에 있어야하는 시간이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집에 마음가는 물건이나 분위기에 둘러싸여있지 않다면 아마도 오랜 시간 집에 있는 것이 퍽 즐겁지만도 않을 테니까. 어떤 것이 좋은 물건인지, 그리고 좋은 물건을 어떻게 하면 오래 쓸 수 있는지, 고쳐쓸 수 있는 방법은 있는건지 알아두면 우리는 이 사랑스러운 물건으로 가득한 보석함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이 동료들과 함께 그런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는 회의였다. 다음 미팅도 기대된다. (물론 일이지만....)








연장전 : 거리를 두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선생님이 보내주신 선생님댁 주변의 꽃나무 사진,
답례로 내가 보내드린 우리동네 수양벚꽃나무 사진


얼마전, 안부차 대학시절의 선생님께 연락드렸더니 안 그래도 걱정하던 차였다며 연락주어 고맙다는 답장을 받았다. 선생님은 이야기 끝에 8mb도 넘는 고화질의 꽃 사진을 보내주셨다. '시대가 변했으니 이제부터는 점점 작은 곳, 가까운 곳에서 기쁨을 찾아야할 것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정말로 그럴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던 그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우리는 무얼 잃었고 무얼 얻었을까. 우리는 일상을 잃었다. 소중한 이의 따스한 손길과 온기를 잃어버렸다. 누군가는 계획을 잊었다. 그러나 우리는 잠깐의 강제휴식을 얻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렇지만 갈곳을 잃었던 돌고래들은 다시 살곳을 얻었고, 우리의 땅은 풍요로워지고 전례없이 푸른 하늘을 얻었다. 변호하고 두둔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명백하게 우리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을 테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코로나시대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이제부터 완전히 달라질 세상 속에서 우리는 뭘 보고 뭘 얻고 뭘 잃고 있는지 점점 더 알게될 것이다.


*4월 11일 충북 청주시 오송읍 질병관리본부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정례 브리핑에서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의 발언




PS. 그건 그렇고 온라인 미팅 속에서 나는 여전히 슬쩍 슬쩍 보이는다른 이들의 집이 자꾸 궁금하다.

역시 집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나봐 얘들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