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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Apr 26. 2020

록다운이 선물한 리틀 포레스트

뒤뜰 있는 집의 풍경

2020년 4월 26일

날씨 : 쾌-청

기록자 : 뽈     


수아의 일기를 읽고 곰곰 돌이켜봤다.

대-코로나 시대 이전의 내게 오후 4시의 자유가 주어진 적이 언제였더라. 잠깐, 그보다 나는 좋아하는 시간을 충분히 누린 적이 있었던가. 아니,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란 게 있긴 했나?




근래 몇 년간, 오후 4시의 나는 대개 출근 중이거나 출근을 준비하는 중이거나 늦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퇴사 이후 작은 술집을 운영하고 동시에 바에서 일하는 투잡을 하게 되면서, 나는 직장인과 정반대의 루틴으로 살게 되었다. 일은 이르면 오후 다섯 시에 시작해서 새벽 두 시에, 혹은 저녁 여덟 시에 시작해서 새벽 다섯 시에 끝났다. 더 늦게 끝나는 날이면 출근하는 이들 속에 뒤섞여 퇴근했다. 저녁엔 일하므로 저녁 있는 삶이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낮이 있는 삶을 누린 경우도 드물었다. 낮엔 밀린 잠을 자야 하니까.     

 

런던에 와서 루틴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쓰리잡을 뛰려니 여전히 빡빡했다. 늘 시간에 쫓기거나 시간을 쫓았다. 오후 4시며 좋아하는 시간이며 여가 시간이란 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었지. 그러던 와중에 록다운이 딩동- 벨을 누른 것이다. 그동안 갖지 못했던 여가까지 소급해서 가지라고 시간 다발을 한 아름 안아 들고서. 아, 내 인생을 망치러 온, 시간의 구원ㅈ..ㅏ..     


아무튼 초반엔 시간이고 나발이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기만 했다. 그러나 날마다 그렇게 지낼 순 없는 노릇이고 일주일 내내 누워만 있자니 사실 허리도 끊어질 것 같아서, 얼마 후에는 멍을 때리더라도 앉아서 하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다 어느 날 햇볕이 유난히 좋길래 의자를 창가로 옮겼다. 그러자 내가 이전에는 이 창의 바깥을 한 번도 유심히 본 일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방이 어디게


 내가 지난주까지 살았던 플랏은 작은 뒤뜰이랄까, 정원을 가진 칠십 년 연식의 삼층집이다. 이 층에 있는 내 방 창을 열면 우리집 정원을 포함해 양 옆집과 맞은편, 심지어 대각선에 자리한 플랏들의 정원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찬찬히 둘러보니 풍경이 꽤 좋았다. 봄이 성큼 다가온 만큼 집마다 가진 나무들에 살잎이 통통히 올라 싱그러웠다. 메마른 마음에 단비 내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정원에서 녹음 이상으로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둘 보였다. 이웃 사람들이 각자의 정원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집에 갇혀 있는 데다 가진 거라곤 시간과 이 아담한 뒷마당뿐이니 그럴 만도. 우선 내 방 왼편의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매주 친구들을 불러다 밤새 성대한 파티를 열어서 주말마다 내 인내를 시험하던 이탈리안들이 모여 사는데, 이들은 파티피플답게 오전부터 정원에 매트리스 토퍼와 빈백을 내놓고 그 위에 누워 스피커 볼륨을 한껏 키운 채 음악을 듣는다. 클럽 음악과 EDM부터 흘러간 힙합과 올드팝, 쿠반 음악까지 당최 이 뒤죽박죽 플레이리스트의 주인이 누구인고 묻고 싶을 정도로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늦은 오후로 접어들면 일행 중 남자 하나가 알 수 없는 멜로디를 기타로 뚱땅거리며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른다. 솔직히 말해 그는 기타를 잘 치는 편도 노래를 잘 부르는 편도 아니지만 또 아주 못 들어줄 만한 건 아니어서.


뚱땅뚱땅


핫둘핫둘


오른편 플랏에는 대가족이 살고 그 집 할머니는 낮에 흔들의자에 앉아 무릎 위의 꼬맹이 손녀에게 책을 읽어준다. 저녁 여섯 시쯤엔 식구들이 전부 모여 국적 불명의 곡을 틀어두고 그 음악에 맞춰 체조도 춤도 아닌 아주 요란한 몸짓을 뽐낸다. 아무래도 운동인 것 같긴 한데.. 정체를 모르겠다. 몇몇은 낮에도 연습을 한다니까. 왼편 대각선에 위치한 플랏 아저씨는 가드닝을 한다. 화분을 갈거나 새로운 모종을 심고 잔디를 깎거나 물을 준다. 일주일에 한 번쯤 바비큐 냄새로 나를 괴롭게 만든다. 한편 맞은편 플랏에 사는 여자는 썬베드를 깔고 누워 샘 스미스 노래를 들으며 태닝을 한다.      


정원에는 인간이 아닌 친구들도 자주 들른다. 청명한 하늘을 활강하다 잠시 담에 앉아 쉬어가는 갈매기(궁금한 건 바다도 없는 도시에 대체 왜..?)와 개나리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벌떼와 남의 집 정원에서 투닥거리는 검은 고양이와 회색 쥐, 같은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큰 숲의 캠핑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짬-푸


나는 점점 의자를 창가에 바투 붙여놓고, 무엇이든 거기서 했다. 같은 방에 쭉 살았음에도 지난 반년 동안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을 관망하는 일이 즐거워졌거든. 오전부터 창턱에 발을 길게 뻗고 눕다시피 앉아서 넋을 놓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셨다. 기름에 볶은 마늘의 향긋한 냄새가 창틈으로 불어오면, 포크와 나이프가 달그락 부딪치는 소리와 모여서 음식을 먹는 소리가 들리면 나도 아래층 부엌에서 밥을 가져와 먹었다.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과 옆집 빨래가 바싹 마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음악을 듣고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다. 너무나 혼자였으나 그럴 때만큼은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방을 떠나올 때 가장 아쉬웠던 것도 뒤뜰의 풍경이었다


각자의 정원이 만들어내는 저마다의 크고 작은 소리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안도와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다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임이 분명할 텐데 꽤 명랑하구나 싶어서. 그래서 그들이 모르는 사이 정원을 굴러다니던 그 명랑함 한두 알 정도를 슬쩍 주워오기도 했다. 부족해지면 입안에 넣으려고.

혹은 아마 그때부터, 이미 아쉬워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록다운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그 명랑한 장면들을. 그 봄, 정원의 시간들을.







그리고 사람들은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휴식을 취했으며,

운동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놀이를 하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배우며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더 깊이 귀 기울여 들었다.

어떤 이는 명상을 하고, 어떤 이는 기도를 하고, 어떤 이는

춤을 추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그림자와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치유되었다.

그리고, 무지하고 위험하고 생각 없고 가슴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라지자

지구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위험이 지나갔을 때

사람들은 다시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잃은 것을 애도하고,

새로운 선택을 했으며,

새로운 모습을 꿈꾸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치유받은 것처럼

지구를 완전히 치유해 나갔다.     


키티 오메라,「사람들은 집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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