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나의 삶을 쓰는 게 부끄러웠다, 는 말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다.
그가 아니었다면. 수아의 흔쾌한 호의가 없었다면. 나는 확실히 한국에 돌아오기 어려운 신세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게 옅은 괴로움을 준다.
나라는 변수가 이 애의 일상에서 어느 정도의 변화(라고 쓰고 불편이라 읽지)를 담당하려나, 란 문장이 머릿속에 있다. 노트북 모니터 오른편 모서리에 내내 띄워두는 어떤 메모처럼, 그 문장은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계속 있다. 그런지 꽤 되었다. 런던을 떠날 것을 고민하기 시작한 때부터 여지껏 끈질기게. 시제(담당하게 되려나, 담당하고 있으려나, 담당했으려나)만 이따금 바뀔 뿐이다. 계획에 없던 동거(라고 쓰고 일방적 신세 짐이라 읽지)에는 그런 문장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신경 쓰며 눈치 보는 타입은 또 아니어서, 그 애의 일상에 실제로 변화가 일었는지 아닌지, 그가 그 변화를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는 어쩐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도 같다. 우스운 말이지만. 어쨌든 그 문장은 그냥 그 자리에 떠 있을 뿐이다.
이 집에 온 날은 자가격리가 해제된 지 나흘째 되던 날로, 그때 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마주치는 일을 한창 어려워해서 스스로 외출을 삼갔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 누비며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믿던 마음은 2차 검사의 음성 결과를 알리는 보건소의 문자를 받자마자 별안간 사라졌다. 6주 만에 문을 활짝 연, 아주 낯익은 도시 품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됐는데. 오랜 친구들과 재회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맥이 풀려있었다. 외려 격리 기간에 겪은 것보다도 큰 무력감을 맞았다. 연유야 알 수 없었고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 때에 이곳에 왔다. 영국으로 떠나기 직전, 수아가 막 이사를 마친 직후에 집들이 삼아 잠깐 들렀었던 집은 반년여의 시간이 흐른 새 제법 갖춰진 모습(aㅏ, 깔끔함과는 별개임)이 되어있었다. 당분간 지내게 될 작은 방에서 옷가지를 꺼내 정리하고, 방을 대충 쓸고 닦았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던 게 꽤 피곤했던지 금세 녹초가 돼서 대자로 뻗었다. 누워서 천장을 보며 생각했던 것 같다. 그새 어엿해진 건가. 작은 친구도, 그의 집도.
아무튼 그날부터 나는 임시적 플랏메이트가 되어 살고 있다. 기상과 동시에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내 여력이 허락하고 내켜하는 영역만 시끄럽게 청소기를 밀고 물걸레로 방과 공용 공간을 대충 닦는다. 창틀과 가스레인지를 닦고 빨래를 돌린다. 수아가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만들고 마주 앉아 먹는다. 혼자 먹는 밥을 준비하는 마음과 둘이 먹는 밥을 준비하는 마음 사이엔 약간이나마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간다.
한 집에 지낸 시간이 길진 않으나 경험과 관찰에 의한 결과, 내 플랏메이트는
아침에 커피를 내려 마시는 사람.
집에 꽃을 두는 사람.
먼저 제안하는 사람.
열심히도 사는 사람.
내 유난과 까탈과 정체불명의 음식에도 자못 무감할 줄 아는 사람.
지루해졌다고 생각한 내 플레이리스트를 함께 들어주는 사람.
종일을 하릴없이 앉아있던 나를 일으켜 천변에 데리고 나가는 사람.
덕분인지 이제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부터 마시고 싶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많은 천변이라도 걷고 싶어진다.역시 내 플레이리스트는 썩 괜찮단 생각을 한다. 어떤 기다림은 그리 나쁘지 않기도 하단 걸 다시 깨닫는다. 버스와 지하철 타는 일이 몇 주 전보다 덜 두렵다. 보고 싶은 책과 영화가 하나둘씩 시야에 들어온다. 이유야 어쨌건 웃는 빈도가 는다. 옅은 괴로움이 좀 더 옅어질 때가, 짙게 드리워진 무력감이 살짝 걷히는 듯한 때가 종종 있다. 생전 관심 가져본 일이 없는 꽃집이 눈에 띈다. 그리고 나도 산다. 집에 둘 꽃을.
나라는 변수가 이 애의 일상에서 어느 정도의 변화를 담당하려나, 란 문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애초부터 잘못됐을지 모르지.
가운데에 커서를 놓고 몇 자를 지운 뒤 몇 자를 고쳐본다. 그렇게 고친 문장은,
안 알랴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