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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Jul 16. 2020

無名에게

2020년 07월 16일 목요일

맑고 더움.

기록자 : 뽈


나는 INTJ. 수년에 걸쳐 수 번을 해도 늘 같은 결과가 나오는데 읽다 보면 언제나 갸우뚱하다.

그치만 이 짤만큼은 인정.


      



2019년 9월 27일 금요일.

금요일 오후의 ‘M’ 탭하우스는 한산했다.

나와 동그라미, K는 둥근 배럴 테이블에 삼각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심상한 체 하려 했으나 이들의 앞선 글을 보면 상기된 표정과 목소리만은 감춰지지 않았던 모양인데. 인정. 실제로 좀 들떠있었다. 모자란 친구의 유럽 진출을 응원하려 친히 런던까지 온 것도 모자라, 다음날 있을 나의 잡 인터뷰에 앞서 분위기를 엿보자며 탭하우스 탐색까지 제안해준 이 친구들이 못내 어여뻤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맥주를 마시자던 느슨한 약속의 실현도 퍽 감개무량했고.



맥주를 마시며 탭리스트를 재차 읽고 바 쪽을 두리번거렸다. 한국에서부터 이력서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잡은 일생 최초의 영어 인터뷰가 정확히 24시간 후에 이뤄진다. 누구와 대면하게 될까. 냉장고 옆에 서 있는 안경 쓴 남자? 아니면 퉁퉁한 체격의 저 사람? 인터뷰가 끝나면? 오로지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다. 내일부턴 나도 저편의 바 안쪽에 서 있게 될까. 서 있고 싶다.



내가 이런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친오빠와의 통화를 마친 동그라미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18년여를 동고동락한 반려견 C의 병세가 최근에 와서 더욱 위중해지고 있는데, 현재 간호 중인 오빠는 곧 유학 중인 미국으로 돌아가고 부모님에겐 돌볼 시간과 여력이 없다고 했다.



그때 동그라미는 석사 졸업과 동시에 바이마르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서 베를린으로의 이주 계획을 막 완성해둔 참이었다. 이사와 구직 비자 신청, 취직 준비가 줄줄이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의 상황은 달랐으나, 외국인 근로자로의 신분 전환이라든가 이전과 꽤 다른 생활이 펼쳐질 출발선에 서 있다는 점만은 비슷했다. 응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난 친구이긴 하지만 나는 그녀를 응원했고 작은 상상도 했다. 내가 런던에서 대충 자리를 잡게 되고 동그라미 역시 베를린의 어드메에서 디자이너로 활약하게 된다면. 다음 해 여름 즈음엔 휴가를 내어 그녀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이름이지만 내게는 낯선 그 도시를 동그라미가 능숙하게 안내해주겠지. 베를린은 틀림없이 따뜻한 도시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되리란 것에, 한 톨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코앞에 다가와 있던 시기. 동그라미는 그 탭하우스에서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 C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고민이 없진 않았을 테지만 망설임은 없어 보였다. 그날의 동그라미 얼굴이 종종 떠오른다. 그 얼굴에서 봤던 것은 어떤 결연함. 희로애락을 나눠온 사랑하는 존재가 져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를 결코 외롭게 두지 않겠다는 다정한 의지.



얼마 안 있어 한국에 돌아간 그는 밤새 울부짖는 C를 품에 안아 달래가며 이별을 준비했고, 두어 달 뒤 그 끝의 곁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오랫동안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한.

여전히 무서운.

그런 이야기.




1999년 겨울.

어디든 떠들썩했다. 세기가 바뀐다고, 곧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누구나 밀레니엄을 입에 올리며 떠들어대던 그 겨울. 나는 엄마의 일터 바로 옆집인 동물병원 쇼윈도 앞에 살다시피 했다. 어느 날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된 눈이 까만 아이에게 완전히 넋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눈은 까만데 하얀 눈 뭉치를 닮은 아이는 태어난 지 석 달 됐다고 했다. 엄마의 퇴근 시간까지 매일 쇼윈도 앞에 쪼그려 앉아서 추운 줄도 모르고 그 아이와 눈을 맞췄다. 만져보고 싶었다. 꼬물거리는 발과 작고 둥근 코와, 따스워 보이는 흰 털을. 밀레니엄의 강림이 며칠 남지 않은 날, 아이를 집에 데려왔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애의 작은 발을 살포시 그러쥐고 악수를 하면서 불렀다. 안녕, 지금부터 네 이름은 해피야. 행복하자 우리. 행복해야 해.


   

해피와의 추억을 떠올리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흐릿하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고 우리는 어쨌거나 2년 가까이 같이 살았는데 어째서. 기억의 분절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뤄지는가. 한 가지만이 명확하다. 해피는 내가 아팠던 모든 순간에 있었지만 정작 나는 그러지 않았다. 곁을 지켜야 했던 순간에 아이를 외면했다.



그날 어디에 있었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픈 해피를 안고 병원에 달려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빠였다. 기억나는 건 수화기 너머 들리던 아빠의 가쁜 숨소리. 출장에서 돌아온 아빠가 거실 전등 스위치를 켰다가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끙끙 앓고 있는 해피를 발견하곤 양말 바람으로 뛰쳐나갔다. 지금처럼 지도가 근처 동물병원을 뚝딱 알려주던 시대가 아니어서 아빠는 골목골목을 내달리며 문 열린 동물병원을 찾아 헤매야 했다. 무슨 병이라고 했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빠가 말했다. 네가 무책임하게 방치한 결과다. 해피가 다 나으면 얘를 더 사랑해줄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뭐라고 답했지. 다행이네, 했던가. 그랬더니 아빠는 무시무시한 침묵을 답으로 주었고. 침묵을 한숨으로 바꾸면서 말했지. 야, 너는... 정말로. 자격이 없는 놈이구나.


 

해피와 살았던 날들의 모든 이야기를 하긴 어렵다. 나는 어렸고, 매우 어리석었으며, 그런 사실들과 별개로 비겁했고, 아주 나빴다. 반려동물은 소유물이나 인형이 아니며 서로의 생에서 꽤 긴 시간 살과 마음을 부비고 지내야 하는 가족임을, 특히 반려인에겐 반려동물의 처음과 끝을 동행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무지도 큰 죄임을. 무엇보다 나는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정도는. 알았으니 정말 나빴던 게 맞다. 결과적으로, 나는 해피를 버렸다. 이 문장에 관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내 손으로 놓아버린 이 일은 내게도 인생의 사건이었다. 온갖 수치심과 죄책감, 서글픔이 뒤범벅된 결과물로 남은 사건. 이후 ‘자격 없음’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불현듯 그 까만 눈이 생각나거나, 해피와 이름이 같거나 얼굴이 닮은 아이들을 우연히 보기라도 하면 온몸이 무턱대고 홧홧해졌다. 아마도 같은 연유로, 한국에 돌아간 동그라미와 왕왕 통화할 때면. 매일이 다르게 쇠약해져 간다는 C의 안부를 물은 밤에는. 반드시 시달렸다. 처연한 울부짖음이 배경에 깔린 꿈속에서 멀찌가니 선 해피는 내가 사랑했던 까만 눈으로 나를 가만 응시했다. 그 아득한 눈에 담긴 건 무엇일까. 원망, 증오, 또? 그래서 나를 버리고 너는 용케 잘도 살았니, 하는 책망과 꾸짖음인가. 꿈에서 깰 때면 조용히 되짚고 인정했다. 누군가의 곁에 있는 존재로서 이미 실격자인 나와, 행복하자 해놓고 불행만 주었던 나의, 자격 없음.




2020년 6월 29일 월요일

며칠 시골집에 내려가 있겠다던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네 길고양이가 창고 계단 아래에 새끼를 낳았다. 삐약거리며 울어대길래 살짝 보니 어미는 없고. 사람 손 타면 어미가 데려가지 않는대서 일단 지켜보는 중이긴 한데 비가 너무 많이 와. 물이 불어나면 저 계단까지 금세 차오를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급히 주변 집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어미는 저녁이나 사람이 없는 때 돌아올 것이니 아기 고양이들이 어미를 찾으며 울다 겪을 탈수 증세를 막기 위한 식수 정도를 근처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는 행동은 삼가라길래 그대로 전했다.



고양이가 다시 언급된 건 며칠이 더 지나서다. 어미가 새끼와 떠난 줄로 알았더니 건강한 녀석만 데려갔네. 있는지도 몰랐던 작고 유약한 아이 한 마리가 남겨져 있다. 계속 비가 오는 통에 달달 떨고 있어. 나는 어미가 다시 올지 모르니 몸을 숨길 수 있는 수건만 포개놓고 좀 더 기다려봐, 라고 답했다. 저녁이 지났는데도 어미가 안 와, 비가 아직도 많이 와. 아빠 목소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예의 답을 반복했다. 얼씬하지 말고 그저 기다리란 내 말을 듣던 아빠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굶어 죽든 얼어 죽든 당장 죽게 생겼는데 죽는 걸 기다리란 말이냐, 를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굵은 빗소리에 편히 잘 수 없었던 아빠는 결국 새벽녘에 담요를 두껍게 깐 상자로 아기 고양이를 옮기고 두유를 따듯하게 데워 먹였다. 아침이 밝는 즉시 아빠가 인근의 몇몇 펜션에 들러 상황을 설명하고 입양 의사를 묻고 면사무소에 전화해 해결 방안을 알아보다 실패하고 가까운 지역의 동물병원을 검색하기에 이르기까지, 어미 고양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과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왜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만 했나.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바엔 애초에 개입해선 안 된다, 라는 강박이 컸던 것 같다. 처음 고양이 이야기를 들은 이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다. 어미 고양이가 끝내 아기를 데리러 오지 않는 경우 취해야 할 수를 여러 갈래로 계산해 봤지만 속 시원한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우선 시골집은 사람이 상주하질 않아 돌볼 이가 없다. 입양하겠다는 이웃은 없다. 아기를 돌보다 야생으로 방사하는 일이 혹 가능할까? 사람의 손을 탄 고양이는 야생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던데. 게다가 그 집은 산중에 있는데 간혹 나타나는 짐승들이라든가 인근 민가에서 키우는 큰 개와 홀로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역시 서울로 데려와 임시 보호를 하며 입양처를 찾아볼까. 한데 내게도 이곳이 임시 거처인 마당에 언제 입양될지 모를 아기를 데려와 임시 보호까지 하자기엔 집주인에게 염치없는 일 아닌가. 출국까지 남은 날이 많지도 않은데. 그러잖아도 비슷한 처지의 아기 고양이들이 넘쳐난다는 요즘 믿고 보낼 수 있는 입양처를 시간 내에 찾을 수 있을까. 못 찾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 회로는 돌고 돌아 ‘아무튼 최상의 시나리오는 어미가 돌아와 데려가는 것’이라는, 기적적이고 거짓된 희망이 어린 가정으로 제자리걸음했다.  



아빠와의 전화가 그런 식으로 끊긴 후 장문의 문자를 여럿 보냈다. 뭐라고 손가락을 놀렸더라. 이건 인간의 작은 연민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미가 데려가는 것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가장 좋은 방법이라 기다리자고 한 것이지, 오해다, 어쩌고저쩌고. 지금에 와 생각하면 내가 또 틀렸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웠던 게다. 지난날 책임을 저버린 경험이 있는 자로서 모든 선택지에서 책임부터 보였으며, 뭐든 책임을 지는 상황에 놓이는 게 두려워서 선택 자체를 내심 거부하고 회피했다. 그러니 틀리기만 한 게 아니라, 또 나빴다. 심지어 이젠 어리지도 않으면서.    



얼마 뒤 아빠에게 연락이 왔다. 아기가 꽤 건강해졌다고, 잔디 위를 뛰어다니기도 한다고,

그리고 키우겠다는 사람을 찾았다고. 나는 다행이네, 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행. 내뱉은 말이란 게 또 그 말이라니. 나 같은 인간은 이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2020년 07월 07일 화요일

예정된 입양일까지 사흘이 남은 날. 시골집에 내려갔다. 아무래도 기분이 개운치 않아서. 마침 할 일도 없으니 하루라도 일찍 아기를 데려와 병원도 가고 좀 더 제대로 돌보고 깨끗하고 안정된 모습으로 보내야겠단 생각으로. 정자 아래 마련된 상자 안에 웅크려있던 꼬마가 나를 보자 깡충깡충 달려 나왔다. 사진 속 모습보다도 실물이 더 작아 놀랐다. 아기는 한 손바닥 안에 온몸이 폭 담길 만큼 작고, 부서질 것처럼 가냘픈 몸이지만 감사하게도 육안으로나마 아픈 데는 없어 보였다. 너무 발랄했다. 낯가림 하나 없이 손가락을 앙앙 깨물다가 발 위를 기어오르고 폴짝폴짝 뛰는 녀석이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의 안도도 느껴져서 한숨 섞인 웃음이 나왔다.     



이튿날 서울로 돌아왔다. 고속으로 달리며 흔들리는 버스를 꼬마가 견딜 수 있을까 염려되어서 이동장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흔들림이 가능한 한 적도록 꾹 잡아가며 오느라 한숨도 못 잤다. 이동장 안이 갑갑한지 꼬마는 가끔 울긴 했어도 대체로 얌전했다. 풀벌레와 새가 우는 너른 곳에서 지내온 아이가 그보다 좁은 집에 적응할 수 있을까 했던 것은 기우였다. 본래부터 제 집이었던 마냥 잘 먹고 잘 자고 잘도 뛰어놀았다. 유튜브에서 본 배변 훈련을 삼십 분 시도했더니 바로 적용하는 얘는 천재인 게 분명해. 애교가 많아 누구에게든 살가웠다. 병원을 가서도 의젓했다. 꼬마를 보면 모두가 미소지었다. 종일 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지루함 없이 흘렀다. 그렇게 사흘은 쏜살같았고.      



2020년 07월 10일 금요일

꼬마를 데려다주었다. 차를 타는 동안 답답할까봐 이동장 안에 손을 넣고 쓰다듬어 주었더니 녀석은 그걸 베개처럼 베고 한 시간 내도록 잤다. 고 며칠 새 차를 타도 태평할 만큼 자라다니, 기특한 것. 정작 태평하지 못한 건 내 쪽이었다. 진짜 집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몸 어딘가의 나사가 꽉 조여오기도, 헐거워져서 축 처지기도 했다. 도착한 집은 아주 넓었고 인사를 나누며 잠시 둘러보니 아이를 위해 이것저것 세심히 준비해두신 것들이 눈에 띄었다. 좋은 집사들을 만났구나. 맘이 놓였다. 어쩐지 술을 오달지게 마시고 싶은 밤이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다행이다.      




쫀쫀하고 폭신한 발바닥. 완두콩알 인형만한 크기의 머리. 콧김의 온도. 핑크빛 세모 모양을 한 코. 졸음으로 가물가물 감기다가도 기척을 좇아 동그래지는 진회색 눈망울. 얄궂을만치 작은 이빨.



꼬마가 떠난 작은 집에서 그가 헤집고 다니던 자리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녀석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나서는 그 하찮고 귀여운 뜀박질을 하다가 쿠션 위에 안착해 용맹하게 쿠션 모서리를 물어뜯는다. 움직임이 뜸해져 제 풀에 지쳤나 싶으면 탁상 다리를 발톱으로 긁고 있다. 내가 앉아있으면 허리께에 몸을 부비고, 누워있으면 배꼽 근처나 턱 밑에 구태여 몸을 구겨넣은 채 배를 씰룩이며 가르릉거리는...

주책이다. 고작 나흘간의 연이었을 뿐이건만. 꼬마도, 꼬마같은 생명체도 다신 만나지 않으면 좋겠다.  



이 글에서는 꼬마로 지칭하고 있지만, 아기는 나와 지내는 동안 무명(無名), 이름이 없었다. 아빠는 꼬마를 ‘나비'라, 때로는 ‘야옹이’라 불렀으나 나는 웬만하면 무엇으로도 부르지 않으려 했다. 곧 만날 진짜 집사들이 이름을 지어줄 텐데 벌써부터 꼬마를 아무렇게나 부르기 시작하면 혼란스럽게 만들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은. 역시 내게는 이름을 짓고 부를 자격이 없기에. 그래서 그랬다.



야아, 나 간다? 하며 애타게 한번 불러보았던 마지막 순간에 꼬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게 등을 보인 채 새집 마룻바닥 위를 사뿐히 총총 걷는 네 뒷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지.

그래. 너는 영영 뒤돌아보지 않으면 좋겠다. 그저 그 사랑스럽고 어여쁜 발놀림만이 계속되면.

그렇게 영영, 행복하기만 하면.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



이 쓸데없이 길고 구린 글을 쓰기가 너무 오래 걸렸다. 마무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음. 귀여운 꼬마 사진으로 서둘러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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