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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pago Jun 02. 2017

독실한 기독교 나라 사모아의 기독교 신자가 아닌 국부

사모아 - 탈라 Tala

주한 인도네시아 관광청 대표이자 대학원 선배인 박재아 대표는 얼마 전 20탈라 사모아 화폐를 선물로 주었다. 20탈라 앞면에 보이는 폭포를 통해 사모아의 자연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화폐 선물을 계기로 사모아 역사를 공부하게 됐는데,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사모아에도 아픈 분단의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됐다.  

사모아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분단이라는 정치적인 비극이 한 민족에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된 남한과 북한의 표준 시간대가 다르듯이, 분단된 사모아 독립국과 미국령 사모아도 다른 시간대를 사용한다. 물론 사모아 민족에게 시간 차이는 남북한의 30분보다 훨씬 크다.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와의 날짜 차이에 따른 교역상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사모아 독립국은 2011년에 12월 30일을 없애고 날짜를 하루 앞당겼다. 이 계기로 사모아 민족의 시간 차이는 23시간이나 됐다. 즉, 서 사모아로 알려진 사모아 독립국은 태양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나라지만, 미국령 사모아는 가장 늦게 해가 지는 땅이 된 것이다.

사모아 민족의 분단은 19세기 말에 발생했단 내전에서 시작됐다. 사모아 부족들이 지도자에 누가 오를지 권력 다툼을 하는 중에 영국, 독일, 미국이 끼어 들며 내전이 발발했다. 1차 사모아 내전(1886–1894)과 2차 사모아 내전(1898-1899) 직후에는 사모아는 공식적으로 서구 열강에 의해 분단됐다. 그 당시 서 사모아는 독일 사모아, 동 사모아는 미국 사모아라고 불렸다. 동 사모아는 아직도 미국령 사모아 명칭으로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고, 서 사모아는 1962년에 뉴질랜드로부터 독립한 후, 1997년에는 국명을 ’사모아 독립국’으로 개칭했다. 여기서 일부 독자들이 ‘갑자기 웬 뉴질랜드지?’라고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사모아 화폐에서 찾을 수 있다.  

주한 인도네시아 관광청 대표이자 대학원 선배인 박재아 대표는 얼마 전 20탈라 사모아 화폐를 선물로 주었다. 20탈라 앞면에 보이는 폭포를 통해 사모아의 자연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화폐 선물을 계기로 사모아 역사를 공부하게 됐는데,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사모아에도 아픈 분단의 역사가 있음을 알게 됐다.

50탈라 앞면을 보면, 꼭대기에 벌집 같은 것이 있는 건물 하나가 보인다. 이 건물은 사모아 수도 아피아(Apia)에 있는 사모아 정부청사다. 그러나 포노(Fono)라는 사모아 국회는 물리누우(Mulinu'u)라는 옛 수도에 있다. 이 옛 수도 물리누우도 아피아에서 약 4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바닷가 동네이다. 1차 대전 때 독일과 영국이 붙으면서 뉴질랜드는 독일로부터 일종의 신탁 통치를 받은 서 사모아를 점령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그 당시의 유엔의 역할을 한 국제 연맹의 감시로 뉴질랜드는 사모아를 신탁 통치하려고 했다. 그 당시에 바로 물리누우에 국회가 설립됐다. 오늘날에 인구가 20만 명도 되지 않는 사모아 사람들 사이에는 2차 대전 이후 민족주의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1961년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85% 찬성이 나오자, 서 사모아 국명으로 큰 충돌 없이 뉴질랜드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이 독립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두 명이다. 하나는 2007년부터 사모아 국가 원수 직을 맡고 있는 투푸아 에피(Tupua Efi)의 부친 투푸아 타마세세 메아올레(Tupua Tamasese Meaʻole)이고 또 하나는 100탈라 앞면에 초상화가 실린 말리에토아 타누마필리 2세(Malietoa Tanumafili II)이다. 이 둘은 독립과 함께 국회로부터 ‘평생 국가 원수’로 임명됐고, 1963년까지 사모아의 공동 국가 원수였다. 1963년에 투푸아 타마세세 메아올레가 별세하자, 타누마필리 2세 홀로 국가 원수로 남았다.  

타누마필리 2세는 현재 사모아 독립국에서 국부 같은 사람이다. 2007년에 사망할 때가지 오 레 아오 오 레 말로(O le Ao o le Malo) 즉, 사마오말로 국가 원수직을 맡은 타누마필리 2세는 사모아 국민으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는데, 국내에서는 통합 정책으로 부족 사이의 갈등을 줄였고, 국외에서는 활발한 외교를 펼쳤기 때문이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얼마 전에 별세한 태국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집권한 국가 원수 명칭을 딴 타누마필리 2세 덕분에 사모아 사람들이 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타누마필리 2세의 특이한 점 하나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그의 신앙이다.  

100탈라 뒷면을 보면 아피아 성당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성당은 바로 정부청사의 맞은 편에 있다. 이것만으로도 천주교가 국교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사모아는 종교적으로 신기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세속주의 나라라 국교가 없지만, 헌법 12조에는 ‘사모아 독립국은 크리스천 교리와 사모아 전통 위에 설립됐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종파적인 비율로 따지면 개신교계 교단에 속한 신자의 수는 약 80%, 18%는 천주교지만, 유력한 정치인들은 주로 천주교 신앙자다. 그렇다면 이 독실한 기독교 국가의 국부 타누마필리 2세는 천주교와 개신교 중 어느 종단을 믿고 있을까?

한국 기독교에서 유래해 모두 종교를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생겨난 통일교가 있듯이, 19세기 중순에 이란 이슬람교에서 유래되고 통일교처럼 모두 종교들을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바하이가 탄생했다. 이슬람교 신학자들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한 참 박해를 당했던 바하이는 20세기 중순에 이르러 호주를 중심으로 남태평양에서 많이 전파됐다. 바하이 선교에 제일 의미 있는 시점은 타누마필리 2세의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1984년에 타누마필리 2세가 개종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한 나라의 국가 원수가 바하이를 믿게 됐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한국경제신문 https://www.hankyung.com/thepen/article/67475 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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