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 세디 Cedi
아프리카는 아픔의 역사를 가진 대륙이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아프리카 국가들은 일제히 독립을 위한 노력을 펼쳤다. 검은대륙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이룬 국가는 남아공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아공의 독립은 자국민 중심이라기 보다는 유럽계 백인 이민자들이라는 의견이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독립의 대표사례로 손꼽기 어렵다. 그렇다면 외부의 도움 없이 진정 아프리카 사람들의 손으로 독립한 첫 국가는 어디일까? 힌트는 초콜렛이다. 이번호에서는 씁쓸한 식민지시대를 넘어 달콤한 독립을 이룬 ‘가나’의 역사를 화폐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열강의 각축장, 크리스티안보그성
크리스티안보그성(Christiansborg Castle)은 50가나세디 뒷면에 있다. 이 성은 가나의 식민지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곳으로, 가나의 역사 유적지들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크리스티안보그성이 세워진 지역을 첫 번째로 점령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확장의 황금기였던 16세기가 막을 내리고 17세기에 들어서자 여러 유럽 국가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다. 하지만 1661년, 덴마크-노르웨이 사람들이 이 지역을 최종적으로 점령하게 되었고, 금과 상아 무역을 본격화하기 위해 이 성을 세웠다. 덴마크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영국이 크리스티안보그성을 비롯한 주변 지역을 매입했다. 크리스티안보그성을 중심으로 북진하여 큰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마시에 수도를 둔 아샨티 왕국이 영국의 장애물이었다. 결국 영국은 아샨티 왕국과 총 네 번에 걸친 영국-아샨티 전쟁을 치르고 1902년, 현재 가나의 영토에 해당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그렇게 20세기 초 가나는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은 현지인을 완전히 무시하는 식민지 정책보다는 표면적인 배려 정책을 내세우며 어느 정도 자치권을 허용했다. 영국 점령 이전에는 아크라와 주변을 포함한 남부 지역 출신 대표들만 지자체 의회에 참석했었지만, 1946년 처음으로 전국에서 온 현지인 대표들이 참석한 자치 의회가 열렸다. 이러한 진보적인 분위기는 곧 가나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기회가 되었고 가나의 독립으로 연결되었다.
가나의 독립을 위해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들이 6대인(The Big Six)으로 불리는 6명의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1947년 골드코스트연합의회(United Gold Coast Convention)를 설립했고, 50세디를 비롯한 모든 가나 화폐 앞면에는 이들의 초상화가 실려 있다. 그렇다면 가나 독립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걸까?
국민투표로 독립을 이루다
특별히 2세디에 초상화가 실려있는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는 가나 독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열혈 독립 운동가였다. 영국은 1947년에 일어난 내란의 원인을 은크루마로 지목하고 1949년에 그를 체포했다. 은크루마가 옥고를 치를 때 그의 지지자들은 컨벤션인민당(Convention People’s Party)을 창당했다. 컨벤션인민당은 1951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영국을 압박했다. 영국은 곧 은크루마를 석방했고, 그는 의원의 자격으로 의회에 들어갔다. 1952년 의회에서 은크루마는 총리로 선출되었고, 가나는 독립에 한 발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은크루마는 가나의 독립 문제를 두고 국민투표 할 것을 적극 추진하였고, 1957년 국민 투표의 결과 가나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콰메 은크루마는 민족주의 사상으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반제국주의 이념 성향이 강해지며 사회주의자에 가까워졌다. 미국은 가나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가나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군부 세력을 지지했다. 가나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인 콰메 은크루마는 결국 쿠데타로 실각하게 된다.
콰메 은크루마는 정치보다는 경제에 집중했던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가나를 독립시키고 헌법 개정을 통해 공화국 체제를 수립한 것보다 경제적 질서를 우선시했다. 10세디 뒷면에 보이는 가나 중앙은행이 1957년에 세워진데 반해 공화국 선포는 1960년이었다. 은크루마 대통령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어도, 서구 열강의 경제 체제로 여전히 현대적인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범-아프리카주의’를 내세워 아프리카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 등으로 그는 가나를 비롯한 아프리카 전역에서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다. 일례로 쿠데타 이후 망명간 기니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메드 세쿠 투레’는 그를 기니의 공동 대통령으로 선언할 정도였다.
한편 가나는 아프리카에서 안전하게 관광할 수 있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1996년에 관광 투자 계획을 세운 가나는 2020년까지 관광객 백만명 유치를 목표로 삼고 있다. 외국인들이 주로 사파리나 바닷가를 보려고 가나에 가지만, 필자는 1세디 뒷면에 보이는 볼타호(Lake Volta)를 관광지로 적극 추천한다. 볼타호에 있는 도디섬(Dodi Island)은 최근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