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근현대사
2019년 4월부터 수단에서 민주화 시위가 계속됐다. 그리고 같은 해 같은 4월에 쿠데타 소식과 함께 수단의 전직 대통령 오마르 알 바시르의 실각 소식을 들려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쿠데타 지도자로 언론에 등장한 아흐메드 아와드 이븐 아우프는 하루만에 국가 수장 자리에서 사임했다는 점이다.
국방부 장관 겸 부통령이던 아흐메드 아와드 이븐 아우프가 현재 수단에서 최고의 행정기관인 과도군사평의회 의장직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수단군 감찰관인 압델팟타흐 압델라흐만 부르한 중장이 임명됐다. 난장판이나 다름없다.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수단에서는 시민보다 군부가 여전히 확실한 실세”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수단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은 민주화의 봄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인가? 수단의 현재를 이해하려면 약 100년전으로 되돌아 가야 된다.
수단이라면 제일 먼저 생각되는 나라가 이집트이다. 고대 이집트 왕국이 이란계 제국에게 멸망하고 나서, 이집트 왕가는 수단으로 피신 가 여기서 다시 왕국을 세웠다. 즉, 수단의 역사는 이집트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반란을 일으키고 자치권을 얻은 후 영토 확장에 나섰다.
이에 따라 수단의 북부는 이집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는 수단을 다스리게 된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중엽 수단에선 이집트 파견된 고급 관료들이 실세 노릇을 했다. 영국의 영향으로 서구화된 이집트 관료들은 수단에서의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다. 이를 기화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바로 마흐디의 난이다.
당시 수단은 이집트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사실상 영국 영향 하에 있었다. 영국 군인들과 이집트 관료들은 전통적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수단 지역 주민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30대 초반의 젊은 신학자 무함마드 아마드는 1881년 자신이 이슬람교의 구세주인 마흐디임이라고 선포하면서 “메시아 예수의 재림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 수단 사람의 단결을 끌어냈다. 대규모 세력을 모은 아마드는 영국-이집트 연합군을 여러 차례로 물리치고 1885년 현재 수도인 카르툼을 장악했다.
실질적으로 통일 수단의 첫 국가 수장이 된 것이다. 아마드는 1885년 발진티푸스에 걸려 별세했지만, 그의 후임들이 그가 건설한 수단을 1899년까지 이끌었다. 1899년 영국은 가장 훌륭한 장군들이 순국한 이 땅 수단을 점령하여 이집트와 합병시켰다.
이집트는 1922년 독립선언을 했지만, 수단에서는 이집트-영국의 신탁 통치가 지속되고 있었다.이집트에서 1952년 왕정이 무너지면서 수단 문제가 다시 한 번 영국과 이집트 사이에서 협상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수단 독립의 길이 열렸다. 수단은 마침내 1956년 독립했다.
수단 정치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1956년에 출범한 수단 공화국에는 총리가 존재했지만, 영국 총독이 비운 자리가 행정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대통령 같은 누군가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정치판도 크게 두 가지 파로 분열돼 있었다. 마흐디의 난을 일으킨 마흐디 파의 후예들이 창당한 움마당과 민족주의와 세족주의를 모방한 민주통일당이다. 이 둘 정당이 양당 구조로 1950년대부터 수단을 끌고 갔으나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았다. 사회적 분단과 함께 양당 내부에서도 별도로 분열이 생기면서 국내 상황이 악화되었다. 바로 이 시점인 1958년, 수단 군부가 조직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수단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이브라힘 아부드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의 권력 장악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훗날 남수단의 독립으로 진화될 남북 내전이 바로 1963년에 터졌고, 정권 불만이 많은 젊은이들은 시위에 나섰다. 더 이상 정권을 유지 못 할 거라고 판단한 아부드 대통령은 1964년에 권력을 임시 정부에게 양보하며 사임했다. 이를 계기로 수단의 1차 군사 정권이 마무리 되었다. 1964년에 출범한 이 정부는 수단의 첫 문민 정부이었다. 즉, 수단은 문민정부 경험이 없는 나라가 아니다는 것이다.
제2편에서는 30년 동안 정권을 장악했지만 현재 체포된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의 정치적 배경과 수단의 현황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1964년 출범한 수단의 첫 공식 문민정부의 핵심이 마흐디 파의 움마당이다. 1965년 움마당은 총선에서 승리를 얻었다. 마흐디 파는 국회를 장악했고, 상징적인 자리에 불과했던 대통령 자리는 세속주의를 표방했던 민주통일당에 양보했다.
1960년대 중반 수단 국내 상황은 독립 직후의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 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가 다시 한번 정치에 개입했다. 이번 주인공은 가파르 니메이리였다. 1969년 쿠데타로 수단에서 정권을 잡은 가파르 니메이리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인물이다.
나세르처럼 당시에 이집트에서 정권을 단일정당제로 장악한 아랍 사회주의 연합당과 비슷한 정당을 창당한 니메이리 대통령은 1985년까지 수단의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는 우선 남수단 문제를 일부 해결하며 경제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면서 국내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이에 니메이리는 지지 회복을 위해 이번에는 이슬람주의를 전파했다. 처음에는 마흐디파와 세속주파를 견제하는데 있어 나름 도움이 되었지만, 그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선포하자 천주교와 기독교를 믿고 있던 남수단과의 관계가 다시 악화됐다. 니메이리 대통령 역시 자신에 앞선 아부드처럼 남수단 문제로 권력을 잃게 되었다. 1985년, 쿠데타를 당한 니메이리는 이집트로 망명을 떠났다.
정권을 잡은 군부는 민정이양을 선언했고, 1986년 마흐디파가 민주주의적인 절차로 다시 한번 정권을 잡았다. 움마당에서 출마해 총리로 선출된 사람은 한 때 수단의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아마드의 증조손주인 사드크 알 마흐디였다. 마흐디 파의 움마당은 수단에서 가장 조직적인 정당이었지만, 수단을 대표하는 다수당이 아니었다. 그 당시 세속주의파의 민주통일당도 있었고, 기타 종교 공동체들의 통합당인 국민이슬람전선당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판의 모습은 다름이 없었다. 움마당은 국회를 장악했고, 민주통일당에게 역시 대통령직을 주면서 권력 싸움을 버리고 있었다.
군부는 무능한 정치에 다시 개입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지지 세력을 찾았다. 바로 국민이슬람전선당이었다. 1989년에 오마르 알바시르가 국민이슬람전선당의 지지를 받으면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아주 쉽게 물려 받아 30년 동안 장악할 수 있었다.
알바시르는 90년대 중반까지 국민이슬람전선당과 함께 갔지만, 중간에 배신을 하고 자신의 종교 공동체와 함께 정당을 세웠다. 바로 국민의회당이다. 그러나 지금 알바시르와 함께 국민의회당의 고위급 관료들은 모두 체포된 상황이다.
군부는 며칠째 정권을 장악했고, 군부 내에서도 빠르게 지도자가 변하고 있다. 시위에 나선 마흐디 파의 움마당, 세속주의파의 민주통일당 그리고 국민이슬람전선의 후예인 국민의회당은 동시에 군사 정권을 거부한다고 외치고, 문민정부를 촉구하고 있다.
결론은 현재 군부의 선택이 어디로 향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문민 정부로 갈 경우, 이 세 세력이 다시 한 번 화합을 이루지 못해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보인다면, 군부에서 누군가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할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남수단이 독립되었다고 해서 수단에서 모든 안보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다르푸르 문제가 있다. 3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심각한 경제적인 문제까지 겪고 있는 수단의 시민 정치는 오늘날 더 큰 문제에 대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