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고 반가웠던 그 때
트램을 타고 센트럴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창밖을 보느라 데 정신이 팔려 정거장을 2개 지나쳤다. 이 정도 거리는 걸어서 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걷던 중,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걸 발견했다.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었다. 맞다, 이곳은 배우 장국영이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공간이었고 이날은 그의 기일이었다. 국화나 자그마한 선물을 들고 그를 추모하는 이들을 보니 그의 마지막 영화 <이도공간>이 떠올랐다.
야우마테이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큐브릭>으로 향하던 중, 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한문으로 쓰여 있어서 그 뜻은 모르지만 포스터 속 얼굴들이 어쩐지 낯이 익다. 자세히 보니 2019년,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이었다. 외국에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한국 영화 포스터가 유동 인구가 많은 지하철역에 떡하니 걸려있으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진다. 아니, 으쓱하다 못해 이렇게 인증 사진도 찍었다.
한국에 없는 이동 수단인 트램과 페리. 그래서 홍콩에 머무는 동안 이 둘을 최대한 많이 이용했다. 트램은 속도가 느려서 마음에 든다. 천천히 가기 때문에 거리 풍경을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다. 넋 놓고 있다가 정거장을 놓쳐도 그 간격이 짧아서 걸어서 되돌아가는 데도 부담이 적다. 이따금씩 덜컹거리는 것도, 투박한 쇳소리도 적당히 귀를 자극해서 좋다.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오갈 때 주로 페리를 탔다. 낮이건, 밤이건 바닷바람은 지친 여행자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누가 더 키가 큰지를 겨루는 듯한 고층 빌딩들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목적지에 따라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등받이, 선장과 운영자들이 갖춰 입은 귀여운 세일러복도 페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홍콩은 자동차의 운전석이 오른쪽이다. 도로의 통행 방향도 오른쪽이라는 뜻이며 길을 건널 때 역시 오른쪽을 먼저 살펴야 한다. 왼쪽이 중심인 한국과 반대다. 그래서 홍콩에 가면 매번 헷갈린다. 그나마 여행 막바지에 적응하게 된 건 바닥에 쓰인 ‘LOOK RIGHT’ 덕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유용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근린공원을 좋아한다. 광활한 대자연도 좋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져서 마음이 크게 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 근처나 오피스 밀집 지역에 조성된 공원을 더 좋아한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고, 초록 식물이 주는 특유의 싱그러움과 안락한 분위기가 주변의 삭막한 빌딩과 대조를 이루고 그래서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도 한몫했겠다. 비록 홍콩에서 만난 여러 근린공원은 주변 회사원들의 흡연 장소로 인기가 좋아 보였지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꿀맛이었다.
서점에 가 책에 둘러싸여 있으면 안정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많은 책들 중 내가 읽은 건 부끄러울 만큼 적다는 걸 깨닫는다. 안정감은 곧 위압감으로 바뀐다. 하지만 대만 출신 서점으로 홍콩에도 진출한 <Eslite>(성품서점)에선 조금 달랐다. 책장 너머 풍경 덕분이다. 야자수 잎이 너풀대고 바닷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빅토리아 하버가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창밖 전망을 포기하고 책을 더 진열할 수 있겠지만 그걸 포기한 서점의 결단력도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