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유럽은?
얼마 전 지인의 블로그 글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언급하는 것을 보았다. 제목은 '인재전쟁: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 KBS 다큐팀에서 제작한, 업로드된 지 얼마 안 된 영상이었다. 안타깝게도 스위스 IP로는 재생할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 다큐멘터리에 자꾸 끌렸고, 결국 VPN을 결제해서까지 영상을 보게 되었다.
내가 중국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으레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듯이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국인을 은근히 무시하는 시선이 내게도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해외에서 중국인 취급을 받으면 기분이 너무 나빴고, 그 때문인지 중국인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지나가면 괜시리 인상이 찌푸려지곤 했다. 중국에 대해 그나마 좋은 기억은 대학생 때 상해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친구를 만나러 잠시 놀러 갔을 때이다. 생각보다 훨씬 도시적이고 깔끔했던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47분 남짓한 영상에 담긴 중국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들의 기술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물론 공대가 주제이니 취재진들은 그와 걸맞는 인재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까지 '공대를 나와야 성공한다' 로 맞춰져 있는 것은 실로 놀라웠다. 영상에 달린 댓글들은 중국이 무섭도록 과학기술에 대한 발전을 거듭하는 것을 보고 한국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다큐를 시청하며 생각난 사람은, 나의 석사 때 수퍼바이저(지도교수의 하위 개념)였던 중국인 박사생이다. 그는 칭화대 출신으로, 이미 회로설계 경험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었다. 교수님으로부터 스카우트되어 왔다는 그는 유럽의 일처리 속도에 대해 푸념했다. 여기서 칩 한 개 만들 시간에 중국에서는 열 개를 만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연구실에는 중국인이 꽤 있었다. 내가 석사 수업을 들을 때도 웬만한 아시아인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인구 탓이겠지 했는데, 그들이 과학기술을 장려하는 국가 출신인 것도 꽤나 영향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내가 졸업한 취리히 공대는 최근 외국인을 대상으로 등록금을 3배 인상했다. 이것 때문에 스위스 내에서는 사회적으로 꽤 큰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특정 국가의 경우 입학생 수를 제한한다. 이 특정 국가 중 한 곳에 중국이 포함되어 있다. 공식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스위스에 유학 온 중국인들이 중요한 과학기술 정보를 빼가서 그렇다는 것이 암암리에 알려져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중국 정부가 그들에게 엄청난 급여와 대우를 제안하며 귀국할 것을 요청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것만 봐도 중국이 얼마나 기술 발전에 혈안인지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유럽의 분위기는 어떨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럽' 이라고 범주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유럽이라도 나라마다 사정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 주 새로 입사한 이탈리아 출신 직장 동료의 예를 들어보자. 그를 아직 잘 모르지만 매일 같은 메뉴의 단촐한 도시락을 싸오고, 집 렌트비를 최대한 아끼려는 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스위스에 왔다' 는 것을. 공대 박사를 졸업한 그는 나름 A급 인재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하길 원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남부의 GDP는 한국보다 많이 떨어지는 수준. 젊은 그가 돈을 모으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시칠리아 출신인 그가 고향을 뒤로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금전적인 부분이 크다.
스위스는 나라의 인구 자체가 작아 중국처럼 대규모 인재 양성 모델을 채택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전 세계 각국의 인재를 모셔오는 형태로 기술 발전을 하고 있다. 전 세계 대학 랭킹 TOP 10에 드는 취리히 공대의 박사과정 학생은 50% 이상이 외국인이다. 스위스의 연방 공대들은 최신 기술 관련 학생들의 창업도 적극 지원한다. R&D 중심의 기술 연구소들도 고연봉과 높은 질의 삶을 보장하는 스위스 생활로 인재들을 영입한다. 스위스에서 교수로 임용이 되기만 하면 평생 영주권이 주어진다.
여기까지 말하면 단순히 나라마다 인재 영입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계속 들었던 의문이 있다.
'그런데 공학이 적성에 안 맞는 사람들은 어떡하지?'
아무리 국가에서 과학기술 인재를 장려한다고 해도,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것처럼 저마다의 관심사와 재능이 다르기 마련이다. 훈련형 인재는 될 수 있겠지만, 모두가 딥시크를 개발한 CEO처럼 공학 천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공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그게 실제로 불가능하더라도 말이다.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풀라고 강요하면 그건 행복할까?
나는 분명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고, 공대를 나왔다. 하지만 흔히들 이야기하는 '찐 공학자' 는 아니다. 한국문학과 글쓰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한다. 사회 현상에 대한 관심도 많다. 외국어 배우는 것도 좋아한다. 엄청난 기술의 개발보다는 미래 유망성에 초점을 맞추어 전공을 선택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 하는 일이 괴롭거나 고통스럽지는 않다. 기술을 배우는 것은 재미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 가 되고 싶냐고 하면, 그런 욕심은 없다.
유럽에서 만난 현지 여자 친구들은(대학에서 만난 공대 친구들을 제외하고) 나의 전공에 대해 들으면 신기해한다. 한 스위스 여자애는 항상 완벽한 옷차림으로 나온다. 경영을 전공했는데, 최근 한 컨설팅 펌의 인턴십 자리에 합격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물어봐서 아주 살짝 설명하니 복잡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병원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다른 여자애는 내 일에 대해 듣고 '잘 모르겠지만 뭐, 네가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면 된 거지~!' 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나와의 첫 만남에서 내 전공 얘기를 들으시고 '어머, 공학을 전공하는 여자라니 너무 멋지다~! 독일에서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어. 굳이 꼽자면 독일 동부 여자들 정도?' 라고 하셨다(과거 동독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여성들이 일터에 나가 기술을 배웠다. 그래서일 것이라 예상한다. 엔지니어가 많은 인도도 마찬가지.) 분명 나를 치켜세우는 말이었지만 그 말의 저편에 '잘사는 나라 여자들은 기술 안 배워도 좋은 처우 받으며 일한다' 같은 말이 들리는 듯했다.
스위스에 살기에 다른 유럽을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시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유럽인들은 굳이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공대에 가야 한다는 인식은 없는 듯하다. 물론 이곳도 공학자에 대한 처우는 좋다. 하지만 공학자가 아니라고 해서 처우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국과의 가장 큰 차이점인 듯하다. 스위스는 애초에 대학 진학률이 20%도 되지 않는데다가, 고졸이어도 실무 교육만 잘 받으면 연봉이 괜찮은 직장에 다닐 수 있다.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시선도 거의 없다. 스위스에서 석사 이상의 공대생들은 대부분 스위스 이외의 국가 출신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의 선택에는 삶에 대한 태도도 크게 자리한다. 중국은 아무래도 중화사상이 있어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인식이 존재하고, 한국도 유럽에 비하면 '성공' 에 대한 열망이 큰 나라다. 유럽 사람들은 개인주의에 '개인의 행복' 이 무엇보다도 최우선시되기 때문에, 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까지 관심 없는 전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행복이 너무나도 강조되는 바람에 몇몇 유럽 국가들은 크나큰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국가 모델이냐 물으면, 쉽사리 중국이라 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들의 엄청난 기술 발전 속도가 놀라우면서도, 모두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치열한 경쟁에 매달려 대학 입학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선호하는 전공만 다를 뿐, 한국의 경쟁 분위기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분명 그들에게 배울 점은 있다고 생각한다. 화면 속 공부에 매달려 있는 그들의 모습과 스위스 자연을 뛰노는 이곳의 아이들을 보며 오늘도 묘한 감정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