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다 평등한 거 아니야?
오늘 아침에 본 이코노미스트 성평등 지수에 대한 기사다.
29개국 중 한국이 제일 아래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아주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일본보다도 아래라는 것이 살짝 걸리긴 했지만. (그동안 일본의 여성 인권이 최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하위 한국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스위스가 있다. 내가 만 3년째 살고 있는 곳.
스위스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하여 손꼽히는 관광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위스만이 가진 특징이 강한 나라다.
참고로 스위스는 지방 정부(칸톤)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에, 내가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 지역 분위기와 법 체계가 굉장히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취리히를 기준으로 이야기하겠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아직 일하고 있는, 평일 낮에 거리를 걷다 보면 주로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여성 주부들이 많았다. 스위스는 출산율이 약 1.4명(2024년 기준) 으로 아주 높지는 않으나 체감상 주변을 보면 아이를 동반한 부부가 많이 보인다. 다행히 스위스의 교통수단은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에 괜찮은 수준이지만, 둘셋 되는 어린 아이들을 끌고 다니는 엄마들을 보면서 쉬운 일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평일 낮에 돌아다니는 아빠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유럽의 성평등과 복지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스위스의 사정에 대해 궁금해졌다.
스위스에 10년 이상 거주한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생각보다 스위스에서 아빠가 외벌이를 하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스위스에서 외벌이보다 맞벌이로 살아가는 경우 세금을 더 많이 내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율은 수입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20-30% 정도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또한 인건비가 많이 드는 나라이기 때문에 스위스의 어린이집은 굉장히 비싸다.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어린이집이 많아 매일 도시락을 싸 주거나 귀가할 때 챙겨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고에 들어가도 급식을 제공하는 학교가 많지 않아 가정부가 있는 집이 아니라면 부모가 자녀의 끼니를 챙겨주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기본 급여가 높은 스위스에서는 수입이 더 많은 사람이 외벌이로 경제생활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주부로서 살아가는 가정이 많다. 스위스에서 고소득 직군인 금융계와 엔지니어 계통은 남성이 대부분이므로, 많은 여성은 자연스럽게 직장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스위스의 남성 육아휴직 일수(10일)도 다른 유럽 국가(예를 들어 독일은 최소 2달이다)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할 때 여성이 불리한 상황에 있는 것은 이곳에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공계에 몸담고 있는 여성 엔지니어로서 말하자면, 스위스에서 여학생의 공대 진학률은 높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이공계열 여성 인력 부족 현상은 존재하지만, 특히 4년제 대학 진학률이 20-30%를 넘지 않는 스위스에서는 여학생이 공학계열을 선택하는 경우가 드물다. 학교에서 석사논문을 쓸 때, 웃픈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 포함 4명의 여학생이(모두 같은 공학 전공 출신이었다) 과 건물의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커피 머신 관리자가 와서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 층 연구실 소속이 맞냐고 반복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너무나도 황당한 태도에 우리도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여학생을 보기 쉽지 않으면 그런 의심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가끔 캠퍼스를 돌아다닐 때 내가 얼마나 소수자인지 느낄 때가 많다. 우리 과 건물은 살짝 언덕에 있어 경사진 곳을 올라가야 했는데, 수업 쉬는 시간이라도 겹치면 수업을 마친 수많은 남학생들이 우르르 나와 그 언덕을 내려갔다. 그들을 헤치고 올라가며 나는 홀로 알을 낳기 위해 강물을 거슬러 가는 연어가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나는 검은 머리 아시아 여성이니 이곳에서 더욱더 튄다. 대부분의 전공수업에서 혼자 한국인 여성이었는데, 괜히 무시당하기 싫어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스위스도 확실히 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불리한 상황이 존재한다(사실 스위스는 여성에 대한 참정권을 1970년대에 들어서야 보장했다!). 스위스가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직장인들이 자신의 근무 비율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육아에 대한 금전적 부담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주당 60-80% 근무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허가하는 굉장히 흔한 일이라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대개 이 방법을 선호한다. 당연히 급여는 100% 일하는 것보다는 적게 받지만,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길 때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큰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로 집에서 일하는 유연근무제도 굉장히 흔해져, 주 3회만 직접 출근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가정도 많아졌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방법이 커리어와 가정생활의 밸런스를 유지하기에 괜찮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커리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직장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서 한국에 살 때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 것은 곧 내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이며 내 인생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장기간 살아가게 되면서 이 나라와 주변 사람들을 지켜보니, '아이를 낳아도 살 만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딩크' 를 선언하던 나였기에 스스로 굉장히 놀랐다. 당연히 여성으로서 출산, 육아의 고통은 크겠지만, 아이를 낳고서도 행복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 같다.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자연과 함께 뛰노는 스위스 아이들을 보면서 내 아이에게 좋은 환경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이를 존중해 주는 직장 문화 또한 내 생각을 바꾸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사실 스위스는 어떻게 보면 한국보다도 이공계 여성 비율이 낮고, 일하지 않는 여성의 비율도 생각보다 높은 나라다. 내가 졸업한 취리히 공대 역시 여전히 남학생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공대를 졸업한 여성으로서 대부분의 교수들이나 내 분야의 존경하는 엔지니어들이 모두 남자인 것은 분명히 아쉽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는 나 혼자 여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내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여성 공학자들을 만나면 너무 반갑다. 여성이 마이너리티인 분야에서 더 많은 여성이 진출하는 것은 정말로 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비슷한 환경에 놓인 여성 엔지니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마찬가지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더 많은 여성이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곳에서도 분명히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선과 차별이 존재하겠지만, 한국인으로서 내가 느낀 점은 스위스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한국에서보다는 수월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스위스도 한국도 긴 역사 속에서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여성이 가정을 돌보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더 많은 여성이 이공계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을 지지하고 싶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