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네
"스위스 애들은 뭐하고 놀아?"
가끔 한국에 갈 때 자주 듣는 질문이다.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나라라서 그런지, 젊은 사람이 즐길거리는 별로 없을 것 같아 하는 질문인 것 같다. 사실 한국에 비해 유흥을 즐기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선 어딜 가나 비싼 물가가 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녁식사를 외식한다고 하면 두 명이 100프랑(한화 약 15만 원)을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다. 밤늦게 여는 술집도 많지 않고, 특히나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는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밖에서 식사하기보다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하고, 친구들도 집으로 초대해서 만나는 경우가 많다. 비용도 훨씬 덜 들고 좀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살 때 집으로 친구를 초대한 적이 거의 없었던 나에게는 매우 신기한 문화였다.
스위스에 산 지 나름 오래된 지금은 요리도 곧잘 하고, 친구들로부터 집으로 초대받는 것도 익숙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하이킹(등산) 을 취미로 갖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하이킹을 취미로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릴 적 아빠 손을 잡고 한두 번 산에 올라 본 게 다였다. 집에서 가까운 산이 있었지만 가족끼리 등산 여행을 한 적도, 친구들과 등산을 하며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연인과도 당연히 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위스에 오고 나서 이곳의 친구들이 어떤 취미생활을 하는지 관찰해 보니, 주말만 되면 산 속으로 나들이를 가는 친구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위스가 아무리 산으로 유명하다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젊은 사람들이 하이킹을 간다는 것은 너무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데다가, 꼭대기에서 즐기는 절경을 제외하면 큰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미보다는 고통이 훨씬 더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3년이 지난 지금, 나 또한 매주 주말 날씨를 알아보며 조금이라도 괜찮은 것 같으면 하이킹을 가는 것을 계획한다.사실 스위스에서 이곳 저곳 다니다보니 웬만한 풍경은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도 않아 특별한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얼마 전 등산화도 따로 장만했다. 운동은 장비빨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대로 된 등산화를 사고 나니 더욱더 하이킹을 즐기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올해 들어 더욱 자주 가게 된 나의 하이킹 경험을 되돌아보며 스위스 사람들이 특별히 산을 자주 찾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해 봤는데,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접근성
스위스는 한국 면적의 절반이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굉장히 교통이 편리하다. 특히 기차가 기본적인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웬만한 작은 마을에도 기차역이 있고, 심지어 산 중턱까지 이어지는 산악열차도 아주 많다. 그래서 산악열차를 타고 산의 중간 부분까지 올라가서 정상 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하면 산의 윗부분을 등산하면서 멋진 풍경을 계속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등산로에 대한 안내 표지판도 잘 되어 있다. 스위스의 등산로는 경로에 대한 안내판뿐만 아니라 바위에도 표시되어 있다. 흰색과 빨간색의 가로줄 무늬가 바위에 그려져 있다면 등산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낯선 곳을 가도 길을 찾기가 용이하다. 그리고 스위스 사람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사용하는 Alltrails 라는 등산로 앱이 있는데, GPS 기반으로 길찾기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앱이라서 최근에 하이킹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와 사진도 볼 수 있다. 나도 하이킹을 계획할 때 웬만하면 이 앱을 사용해서 등산로의 난이도와 어떤 풍경을 볼 수 있는지를 미리 확인해 본다. 등산로를 따라 정확한 경사도까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계획할 때 굉장히 편리하다. 예를 들어 나는 경사로를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을 힘들어하기 때문에, 내려가는 코스가 길다면 그 등산로는 선택하지 않는다.
2) 경제성
모든 것이 비싼 스위스에서 돈 안 내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아름다운 자연이다. 하이킹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취미다. 등산화만 제대로 장만했다면 이곳 저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물론 이것에도 등급이 존재하지만, 요트 타기나 스키에 비하면 준비할 것도 많지 않고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다. 특별한 스킬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의 근력과 지구력이 있다면 장시간 하이킹도 즐길 수 있다. 연인, 가족, 친구들과 함께 경제적 부담 없이 하기에도 좋은 활동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힐링이 된다. 서로 격려하며 정상까지 오른 후 즐기는 피크닉도 하이킹의 묘미이다. 나의 경우 주로 남자친구와 함께 가는데, 배낭에 치즈, 와인, 햄 등 간단히 즐길 만한 간식을 넣어서 간다. 정상에서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산에서 먹는 음식은 한층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내가 정상까지 올랐다는 뿌듯함은 덤이다. 뷰가 좋은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하는 것보다 저렴하면서도 특별한 경험이 된다.
3) 아름다움
산으로 유명한 이유가 있다. 스위스의 산 풍경은 정말로 아름답다. 산꼭대기가 어찌나 예쁜 삼각형 산 모양인지, 보고 있으면 신이 공들여 깎아 놓은 것 같다. 3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의 꼭대기에는 여름에도 눈이 소복히 덮여 있다. 스위스에는 산만큼 호수도 많은데, 웅장한 산을 사이에 낀 에메랄드 빛의 호수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물이 깨끗하고 맑기 때문에 여름에는 호수에 수영하러 뛰어드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스위스의 Oeschinensee는 빙하가 녹아 형성된 빙하호수(Glacier lake) 으로도 유명한데, 직접 찾아가 보니 사진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멋진 경관이었다. 호수 수영에도 이제는 자신감이 생겨 특별한 사진까지 남기고 좋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칸톤(스위스의 주 단위) 마다 모양이 제각각 다른 산들이 있고, 풍경 또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곳곳을 찾아다니는 재미가 있다. 여러 곳을 다니다 보면 어느 지역에 가장 아름다운 산들이 많은지 나름 감도 생긴다. 스위스에서 자연으로 눈호강하기에 최적이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스위스에서는 놀거리가 없어서 등산한다고 하는데, 나도 여가시간을 최대한 즐겨보고자 반 강제적으로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진정한 하이킹의 매력을 깨닫고 가능한 한 자주 즐기려고 한다. 하이킹은 등산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매력적이지 않은 활동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좋은 등산로와 어느 정도의 체력을 갖춘다면 충분히 일반인도 쉽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스위스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하이킹을 반드시 일정에 넣는 것을 추천한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이곳에서의 하이킹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