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우리는 모두 '해적'이었다
'해적판'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마 태어날 때부터 '글로벌 동시 발매'에 익숙한 Z세대 친구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콘텐츠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미디어 회사에 다니고 있다. 콘텐츠에 대한 관심은 초등학생이던 이십여 년 전부터 이어져 왔는데, 그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나라는 개인 안에서도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가파르게 변해 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콘텐츠는 '만화책'이었다. 놀랍게도 부모님의 영향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우리 부모님이야말로 그 시대엔 보기 드물었던 오타쿠가 아니었나 싶다.
모두 알겠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막 발매한 따끈따끈한 신작을 구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다. 아마존을 통한 해외 배송도 금방 되는 데다, 유명한 작품이라면 잠깐만 기다리면 우리나라 출판사들에서 금방 판권을 사서 번역본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일본의 유망작들을 일본 사람들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다.
만화에서만 그럴까? 극장의 시대가 저물고 OTT 바람이 글로벌을 휩쓸면서 '전 세계 동시 공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세계 각국에 대한민국 콘텐츠의 저력을 보여준 <오징어 게임>만 해도 시즌 1과 2가 모두 전 세계 동시 공개 되었으며, 시즌 3도 동일한 방식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즉,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이란 콘텐츠를 비슷한 시기에 즐기고 후기를 공유할 수 있으며, 그런 환경이 갖춰져 있기에 지금의 콘텐츠는 지역이나 국가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약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의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즐긴다는 건 생소한 개념이었다. 나는 그 시절 <모노노케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아키라> 같은 명작들을 수도 없이 접하고 미국드라마 <슈퍼내추럴>이나 <트루블러드>, <슈츠> 같은 작품들을 보며 "와, 드라마가 이렇게 길 고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당시에는 이런 작품들을 한국어로 볼 수 있는 합법적인 사이트가 없었는 도대체 어떻게 접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 글의 소재 '해적판'을 통해서다.
당시 역 앞에는 외국의 유명한 작품들을 녹화해서 자막을 달아놓은 불법적인 비디오나 DVD를 수도 없이 팔았다. 남의 저작권을 훔쳐서 판다는 점에서 '해적판'이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 당시엔 이 길거리 가판대 속에 글로벌 콘텐츠의 추세가 담겨 있었다. 요즘 일본, 미국엔 어떤 콘텐츠가 유명한지 가판대를 한번 죽 훑으면 알 수 있었다. 배곯은 장발장이 빵을 훔쳐 배를 채우려 했듯, 나와 당시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저작권을 훔쳐 좋은 콘텐츠에 대한 열망을 키워왔던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그것이 '훔치는' 행위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넷플릭스나 티빙을 통해 세계의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고, 최근에 나온 만화책의 번역본을 침대에 누워 e-book으로 감상하는 지금도 가끔은 깜짝 놀라곤 한다. 콘텐츠 얼리어답터가 당연히 '해적판'을 구매하고, 푸르나와 당나귀 같은 파일공유 사이트에서 백 원, 백오십 원에 콘텐츠를 구매하던 시기에서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미 타인의 '저작권'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을 가지고 콘텐츠를 대하고 있다.
물론, 또 다른 K-콘텐츠 붐의 주역인 웹소설과 웹툰을 불법 공유하는 사이트들이 기승이라는 뉴스를 발견하기도 한다. 아직 우리나라의 저작권의식이 바닥이라며 혀를 차는 댓글들을 보면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는 깨달음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의 저작권 인식은 굉장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때 콘텐츠 '해적'이었다. 아마 나 말고도 수많은 '해적'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많은 해적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확언할 수 있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이 더더욱 사라질 거란 점이다. 그리고 그 속도를 가속하고, 해적 없이 청정한 콘텐츠의 바다를 더 빠르게 마주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 '올바른 저작권 인식'을 공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