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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영 Aug 18. 2022

분노의 맥락

- 2018년 6월 성신여자대학교 학보사 '성신학보사'에 기고했던 글을 대신 브런치에 옮깁니다. 2018년 6월의 시점에서 쓴 글이고 어떠한 수정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최근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거의 모든 나사 구멍이 휴지나 실리콘으로 막힌 광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나사 구멍을 휴지나 실리콘으로 막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이 화장실을 거쳐 간 여성들을 상상해본다. 무엇보다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점은 요즘 들어 휴지나 실리콘으로 막은 듯한 구멍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둘씩 늘어나는 구멍을 볼 때마다 여성들이 가진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공포심을 함께 공유하게 된다.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하는 공간이 나도 모르는 새에 '복수의' 다른 이들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공포. 이런 경우 몰래카메라가 나사 속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이성적인' 조언은 잘 먹히지 않는다. 인터넷 상에서는 이른바 '꿀팁'이라며 화장실 구멍을 막을 수 있는 실리콘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떠돌아다닌다.


여성들의 분노에는 역사가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몰래카메라 범죄에서 '조심'해야 하는 건 피해자의 몫이었다. 계단을 올라갈 때는 짧은 치마를 주의하라는 메시지가 공공연하게 붙어 있었고 여성들은 으레 알아서 범죄를 피해가야 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정작 치마를 손으로 가리면 "그러길래 왜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가리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몰래카메라가 피해자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가 찍지 말아야 할 것으로 바뀐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갈 때는 치마를 조심 하세요'에서 '몰래카메라를 찍으면 안 됩니다'로 바뀐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치열했던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물이다. 점차 달라지는 문구를 보면서 여성들은 '몰래카메라가 피해자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걸 보다 분명하게 재확인하게 됐을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과정 속에서 몰래카메라 등 사이버 성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돕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이나 DSO(Digital Sexual Crime Out, 디지털성범죄아웃) 같은 단체가 나섰다. 한사성은 약 1년 동안 300여 건의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했고 그 상담자 중 여성 피해자가 93.7%에 달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또 한국여성변호사회가 밝힌 통계에 의하면 몰래카메라 피해자의 98.4%가 여성에 해당한다.


하지만 다수의 여성 피해자들은 대체로 경찰에 몰래카메라 관련 사건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된다. 경찰이 사건을 접수조차 받지 않거나 타 지역 경찰서로 사건을 돌리거나, 심한 경우 피해자 탓을 하는 경찰을 만나 훈계를 듣는 등의 2차 가해를 당하는 것이다.


홍대 남자 누드모델 사진 유출 사건에 대해 여성들이 이토록 분노하는 데에는 이러한 오래된 맥락이 있는 것이다. 피해자인 여성들을 탓하는 몰래카메라 범죄를 향한 그간의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가 축적돼 있다가 터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 등 국가 권력은 이러한 분노의 맥락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듯 보인다. 지난달 1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40만 명을 돌파하고 같은 달 19일 혜화역에서 '불법 촬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시위에 1만 2천여 명의 여성들이 참여하자 그로부터 3일 뒤인 21일 이철성 경찰청장은 "피해자 성별에 따라 수사의 빠르기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이 경찰청장은 "몰래카메라 범죄 검거율이 96% 수준"이라는 통계를 들고 나온다. 하지만 피해자가 신고를 했다 하더라도 경찰이 사건이라고 인지를 하지 않거나 조사를 하지 않았을 경우 이는 통계 밖 수치로 잡히게 된다. 앞서 여성들이 경찰에 가서 신고를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면 이 또한 모두 통계 밖 수치에 해당한다. 한편, 2016년 카메라 등을 이용한 범죄로 검거된 5,249건 중 기소된 사건은 1,716건이나 구속된 사건은 154건에 불과('대검찰청 2017 범죄 분석')했다. 구속이 된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이다.


이 와중에 홍대 남자 누드모델 사진 유출 사건이 터졌고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됐다. 이슈가 된 사건에 경찰력이 한 번에 쏠리는 것은 당연했고 6일 만에 여성인 가해자가 잡혀서 포토라인에 섰다. 그간 처벌은커녕 신고 접수 혹은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수많은 몰래카메라 사건과는 대조적이다.


언론에는 법칙처럼 오랫동안 회자되는 말이 있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라는 말이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서혜진 변호사는 "몰카 범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수사 기관도 일상적인 범죄로 대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몰래카메라 범죄가 수없이 일어나다 보니 이에 대해서는 '상수 취급'을 한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반대로 남성이 피해자인 몰래카메라 범죄는 잘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은 (그래서는 안 되지만) '뉴스'가 된다. 언론의 포토라인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그간 피해자에게 온전히 전가됐던 몰래카메라에 대한 책임이 여성들의 운동을 통해 일정 부분 국가의 책임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등이 "성별로 인한 차별을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결과물은 페미니즘 사안에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 여성들과, 여성들에 연대한 일부의 남성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법과 제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개선점이 함께 논의되어야 하지만 먼저 인터넷 쇼핑몰에서 쉽게 구입 가능한 몰래카메라나 초소형 카메라의 구입 제한을 두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많은 여성들이 쇼핑몰 등에 항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이들의 꾸준한 용기로 앞으로의 여성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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