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지영 Jan 03. 2016

면접에 떨어진 날

면접이 소개팅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 주어진 시간 안에 어떻게든 내 매력을 설명해야 하는 절망적인 절차.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겠으나 나에게만은 결코 유리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간들. 그리고 그 절차가 끝나면 날아오는 한 통의 문자까지 모든 게 유사하다. 대개는 그렇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혹은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그들의 '세심한 배려'에 나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아니 많은 경우 나는 이를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비난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 사람을 붙고 떨어트릴 수 있는, 살리고 죽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관계에서 그들은 자신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잃게 될 그 최소한의 예의마저 갖고 싶은 것이다. 욕심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어쩌면 이는 그저 욕심이나 미안함과 같은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리스크 관리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다른 회사도 이런 식으로 하던데, 우리도 이런 문구를 이렇게 저렇게 넣어서 보내자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면접에서 떨어진 후에 털어버리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그날의 그 면접장을 수십번 복원해내는 처지가 가장 비참하다.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이런 표정을 해서 떨어졌을까?' 수십번이고 그날의 면접으로 돌아간다. 기억 속의 나는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었다'고.  


면접에 떨어지면 아프다. 서류나 필기와 같은 그 어떤 전형보다도 더 많이 아프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어렵게 통과한 다른 전형들이 아쉬워서가 아니다. 어쩌면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면접에 떨어졌다는 사실이 아픈 이유는 사람에게 거절 당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일방적으로 몇 분 안에 지원자의 가능성과 장래를 보여줘야 하는 그 애처로운 현장에서 누구든 애를 쓴다. 떨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 나를 그날 처음 본 사람이 내 얼굴을 보고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평가하고 결국 거절당했다는 사실은 개인의 자존감을 훼손시킨다. 시험에 떨어졌다면 공부를 해서 붙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 거절당했다'고 여기면 붙들고 있어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한 상처가 커진다. 


하지만 사실 이는 떨어진 사람의 몫이 아니다. 면접에 떨어진 사람은 자기탓을 한다. '내가' 잘못했고, '내가' 떨어졌고,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보다 더 높은 확률로 좀 더 낫거나 적합한 사람이 된 것에 불과하다. 면접에서 돌아가는 일이나 상황이 전부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에게 나는 너무 '나라서' 조금도 떨어져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가' 거절당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선택된 것이다. 전자라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지만 후자라면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12월에 면접을 두 번 봤고 두 번 떨어졌다. 인정하기가 쉽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화가 났다. 분명 내가 모르는 누군가도 비슷한 마음의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건 결국 내가 나한테 하는 말.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는 말. '힘을 내자'는 말보다 나는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을 갖자는 말을 더 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