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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티 Dec 05. 2021

장작 패기의 기술

어느 날 내 손에 도끼가 들어왔다


시골살이의 정수는 초겨울부터 늦봄까지 난로를 때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뜨거운 난로 앞에서 피가 돌지 않는 손발과 욱신거리는 등짝을 지지며

열에 익어 간지러운 피부를 벅벅 긁어대는 것이 정겨운 우리네 겨울 풍경이다.


불을 피우려면 적당한 크기의 장작이 필요하다.

적당한 크기로 쪼개진 장작을 사서 시간과 몸을 아낄 수 있겠지만

우리 집은 그런 도시인 같은 소비는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가로수를 가지치기 하고 남은 잔가지와 목재상에서 버린 합판을 주워와서 불쏘시개로 쓰고

1톤 트럭 단위로 싸게 파는 통나무를 사서 직접 전기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패서 장작으로 쓴다.

한겨울에는 거의 매일 불을 피우기 때문에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장작 값을 계산해 보면

공산품을 사는 것보다 아무래도 몸이 힘든 것이 싸기 때문일 것이다. 


맑고 아름다운 공산품 장작. 사치 중의 사치

 

도시에서 보일러 스위치만 누르며 살다가 어쩌다 보니 난로가 붙박이로 달린 시골 주택에 살게 되어서 

나무를 줏고 패고 때고 또다시 열심히 나무를 주워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웃 주민들도 같은 상황이어서 겨울이면 집집마다 매연을 내뿜어 동네 공기가 매캐하다. 

공기 좋고 물 좋다는 시골에서 우리는 온기를 얻고 폐 건강을 잃고 있는 중이다.

 

선입선출이 되지 않는 장작더미. 아래쪽 장작의 낯빛이 어둡다.


아침저녁으로 입김이 나고 수족냉증을 도지는 때가 되면 난로를 땔 시기가 온 것이다.  

난로를 때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주로 라이터 찾기, 재 버리기 같은 잡일을 맡는데 

이번에 밖을 산책하다 장작더미 앞에서 엄마를 만났고 

엄마가 갑자기 장작 좀 패 보라고 해서 처음으로 도끼를 잡아보았다. 


생각보다 무거운 도끼를 들고 두어 번 헛도끼질을 하다 몸보다 머리를 먼저 써보기로 했다.

그래서 만물의 보고 유튜브에서 장작 패는 법을 검색해 보니 재야의 고수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장작 패기의 첫 번째 순서는 잘 벼린 도끼를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 도끼는...


녹슨 도끼 (철 오브제, 2021, 파상풍 위험)


산신령이 보고 깜짝 놀라 던져버릴 만큼 녹슨 도끼. 

얼굴에 비벼도 생채기 하나 안날 무딘 도끼날이었지만 가진 게 이것뿐이라서 그냥 쓰기로 했다.

나중에 왜 이지경인 도끼를 쓰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발등을 찍어도 안 다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의 숨은 뜻을 안다. 

새 도끼를 사는 데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게 장작 패기의 기초조차 갖추지 못하니 

어차피 망한 것 같아서 그냥 내키는 대로 도끼질을 해보았다. 

내 안의 숨겨진 폭력성인지 잠들었던 단순노동에 대한 열정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가 피어올라  

요령도 없어 수없이 도끼를 들었다 놨다 했다. 

그 결과 쪼개지란 나무는 안 쪼개지고 어쩐지 쐐기 무늬의 모양만 새겨졌다. 

어쩌면 쐐기문자는 도끼질을 하다 발명된 게 아닐까.



쐐기 문자 해석: 내 도끼는 쓰레기



어디선가 장작 팰 때는 사람이 힘을 쓰는 게 아니라 도끼의 무게로 나무를 쪼개는 거라는 말을 들어서

나는 그 말대로 힘을 주지 않고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냥 내리기만 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힘도 안 들고 나무도 안 뽀개지고 나무껍질조차 베껴지지 않았다.

찍힌 자국으로 알 수 있듯이 같은 곳을 두 번 찍는 스킬도 없어서 

형편없는 두더지 잡기를 하는 것 마냥 칠 때마다 제각기 다른 위치에 내다 꽂혔다. 


나는 안 힘든데 나무는 힘든가봄


계속된 헛된 도끼질에 피 같은 붉은 속살을 내보이는 나무를 보다 보니

문득 장작 패기의 두 번째 단계가 생각났다. 

나무의 중앙이 아닌 가장자리에서부터 패 나갈 것.  

그러나 문제는 또 도끼였다.

보통 평범한 도끼가 이렇게 생겼다면


보기만 해도 날렵한 도끼들


우리 집 도끼는 쇠봉 도끼이다. 


산신령도 던지다 무거워서 짜증 날 도끼


지팡이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긴 손잡이에

인체 공학적인 손잡이 그립 같은 것이 없어 손에서 주르륵 미끄러진다. 

도끼보단 무거운 쇠봉에 녹덩어리가 달린 고철에 가깝다.


이런 고철 덩어리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내리찍는 일은 불가능했다.

들어 올릴 때부터 흔들거리는 내 몸과 마음을 알아챈 도끼는 내려갈 땐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갔다. 

내게도 가볍고 날카로운 현대식 도끼가 있었다면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쪼개나가는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나무 어디라도 맞길 바라며 그저 도끼를 올렸다 내리길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열 번을 치면 그중 대여섯 번은 이렇게 나무에 꽂혔다. 


장작 패기

그리고 나머지 네다섯 번은 나무를 스쳐 땅바닥에 꽂혔다.


땅 패기


그렇게 나무랑 땅을 번갈아 패다 보니 땅도 노한 건지 결국 한 조각의 장작이 떨어져 나왔다. 


가로 6cm 세로 15cm 두께 0.5cm





나무 속살이 드러나면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난다.

피톤치드는 죽어서도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근데 피톤치드가 정확히 뭔지 몰라서 검색해 봤는데 충격받았다.


살.생.효.능
피톤치드 테라피는 L.I.E


우리가 그렇게 상쾌하다고 들이키는 피톤치드는 나무가 짜증 나서 내뿜는 살생 물질일 뿐이라는 사실.

하필 이름이 근사하게 들리는 바람에 이것 역시 마케터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뭘 검색하든 지식백과 검색 결과를 가장 먼저 띄워주면 안 될까? 

피톤치드 스프레이 광고에 혹하기 전에 피톤치드가 뭔지 알 수 있도록... (for you mom)




열 번을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지만 죽은 나무가 독할까 할 일 없는 백수가 독할까

결국 나는 장작의 한쪽 가장자리를 뽀개는데 성공했다.


하면 된다 (안되는 일도 있는 것 같음)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두 번째 세 번째 장작



나무가 시원하게 두 쪽이 나지는 않았지만 

하도 여러 번 쳐서 나무에 균열이 생겼는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조금씩 나무가 쪼개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도끼가 깊게 박혀서 쪼개질랑 말랑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도끼를 빼는 것도 일이라 나무를 통째로 들어서 내려치기도 해봤지만

무거워서 들어 올리는 팔만 아프고 별로 효과는 없었다.

결국 도끼를 빼내서 다시 그곳에 꽂히길 바라면서 내리쳐보았지만

역시나 한번 찍힌 곳에 다시 찍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대충 손으로 꺾었나 그랬을 것이다.


안 그래 보이지만 들어 올린 거임




유튜브가 알려준 장작 패기의 기술 중 세 번째는 나무를 타이어 안에 넣어놓고 패라는 것이었다.

나무가 이리 넘어지고 저리 튀고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연장도 없는 집에 굴러다니는 폐타이어가 있을 리가 없다.

유튜버들의 예언대로 나는 도끼질 한 번 하고 넘어진 나무 세우고

다시 한번 하고 굴러간 나무 찾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도끼질에 아낀 힘을 굴러간 나무 잡는데 다 써버렸다.



만신창이가 된 건 나일까 장작일까


그렇지만 원래 뭣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일이 제일 재밌다고 

나는 금세 무아지경에 빠져 도끼를 휘둘렀다. 

쓰레기와 예술은 한 끗 차이라더니 

그렇게 나는 장작 대신 뭔가를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갈기가 멋진 말의 대가리 (원목, 2021)




장작을 패기 시작한지 30분 정도 되었을 무렵  

앞집 아저씨가 가여운 표정으로 아버지 보고 하라 그래라며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심심해서...라고 둘러대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조각을 주워서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옆집 마당에서 재채기하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장작을 패면 도끼 내리찍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린다.

한창 낮잠 잘 시간에 온 동네 사람들을 다 깨워 버린 셈이다.





결과물은 그냥 좀 다친 통나무랑 껍질 몇 개 

소리로 짐작하건대 엄마는 내가 쌓아놓은 장작을 전부 패오는 줄 알았을 것이다.

자식이라면 안 하느니만 못할 일을 기어이 해와서 한숨짓게 하는 법.

그렇게 나는 오늘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들어와서 다시 난로 앞에 앉았다.  


타오르는 장작의 초상


모양이 어떻든 타긴 탄다. 

어느날 내게 새 도끼가 주어진다면, 우리집에 우연히 폐타이어가 굴러 들어온다면 몰라도 

앞으로 다시는 장작을 팰 일이 없을 것 같다. 

시골 살면서 내가 못하는 일을 하나 더 발견했다. 

그렇지만 그건 좋은 일이다.

내가 안해도 되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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