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자 투표, 투표함, 선거업무 수당
드디어 본투표까지 끝났다. 2월 초 선거인명부 책자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 선거 벽보와 공보물 만들기, 사전투표 그리고 대망의 본투표까지. 한 달 반 이상의 시간이 지나갔다.
구청에 있을 때는 투표 당일에 일반투표사무원으로 차출되어 당일 맡은 업무를 하는 게 전부였다. 선거업무에 더 깊게 관여해야 하는 주민센터 직원은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했고 투표 당일에도 몇 곱절은 더 바빴다.
대신 선거 업무를 더 큰 틀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주민센터 공무원이 바라본 선거 현장에서의 느낀 점을 정리해보았다.
선거 업무를 하는 내내 생각했다. 정말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일까.
선거 벽보 속에 들어가는 포스터는 전국적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왜 선관위는 주민센터로 이걸 하나하나 만들어야 하게끔 보내주는 걸까. 용업 업체를 통해 완제품을 만들어 동 별로 지정한 구역에 매달아주면 안 되는건가. 예산 문제인가?
비닐을 열고 포스터를 넣고 스티커를 떼서 붙인 뒤 뒤에 밧줄을 넣는 작업은 단순해보이지만 몇 십 개를 만드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순간 사기도 꺾인다.
공보물 작업도 마찬가지다. 봉투 안에 내용물을 하나 하나 넣은 건 기계가 아니라 주민센터 직원들과 일당을 받고 도와주러 온 주민 분들이시다.
두 번째로 보내는 공보물에는 등재번호와 자기 투표소가 적혀 있어서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 봉투 안에 후보들의 홍보물이 또 들어가야만 하는 건지는 의문이다. 기왕 보내는 우편인 거, 홍보물을 또 넣으면 좋지 않냐고 하기에는 그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과 인력이 너무나 많다.(예산과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본투표 때 쓰는 선거인 명부 책자도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사전투표 때는 단말기에 신분증을 넣으면 컴퓨터 화면에 자동으로 선거인의 정보가 나온다. 투표 용지 출력까지 한 큐에 이어진다.
반면 본투표 때는 출력된 명부 책자 안에서 선거하러 온 사람의 이름을 찾아 서명을 직접 받아야 한다. 명부에서 자기 이름을 찾으려면 등재번호라는 것을 알아야 해서 투표소 입구에서 등재번호를 찾아주는 인력도 배치해야 한다. 본투표 때도 사전투표 때와 같은 시스템을 쓰면 안 되는건가?
본투표가 끝나고 투표함을 개표장소로 인계하러 가는 과정도 코미디다. 투표함과 투표록 등의 서류가 제대로 갖추어 왔는지 검사를 받아야 투표사무원의 하루가 끝난다.
투표가 끝나자마자 투표함과 투표록을 들고 냅다 개표소로 달려갔다. 물론 경찰 두 분과 참관인 두 분도 함께. 우리 구의 모든 투표소가 한 장소로 집결하기 때문에 조금만 늦으면 줄 맨 끝에 서게 된다.
다행히 우리 투표소는 제법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8시가 조금 넘어 퇴근할 수 있었다… 로 생각이 끝나지 않는다. 정녕 이 방법이 최선인가? 개표 장소를 나눈다거나 선관위가 투표함을 수거하러 오는 방법은 안 되는건가. 그것보다 인계 수당 2만원을 주는 게 제일 저렴해서 계속 이 방법이 채택되는건가.
모두 선관위에서 지시하는대로 하기는 하지만 궁금하다. 이유가 있는걸까, 그저 관례인걸까?(시비 거는 게 절대 아닙니다..)
기준은 모르겠지만 어떤 투표소에는 선관위 직원이 오시고 어디는 안 오신다. 오시더라도 관리감독 하는 형태로 오시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선관위 직원이요, 하고 특정한 곳에 앉아 계시는 게 아니고 같이 섞여서 일을 하신다.(내 경험상 그랬었다.)
이번에 내가 대행사무원으로 투입된 투표소에는 선관위 직원 분이 안 오셨다. 선관위 직원이 아니라하더라도 매뉴얼과 교육을 통해 선거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력이 현장에 배치되기 때문에 진행에 문제는 없다.
문제는 어떠한 이유로 화를 잔뜩 내며 투표소에서 선관위 직원을 찾는 분들이 나타났을 때다. 합당한 이유로 이의제기를 하신다면 당연히 수렴하고 정정해야 하지만 뉴스에서 보는 무지막지한 분들도 상당히 자주 만날 수 있다.
여기 선관위 직원은 없지만 우려하시는 바는 사실이 아니며 문제 삼으시는 부분은 정정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면 “니들이 뭘 알아, XX들아.” 라는 욕설이 돌아온다. 선관위 직원을 한 트럭으로 갖다드려도 욕을 하실 분이라는 결론이 나면 차라리 마음이 한결 낫다. 그냥 욕을 하고 싶으셨던거구나.
투표사무원은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욕을 먹는 데 어느 정도 단련이 된 공무원 반, 수당을 받고 도와주러 오신 일반인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쨌든 직업을 떠나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랍니다. 단련이 되었다해도 욕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나요. 욕하지 마세요!
사전투표나 본투표나 수당은 동일하다. 사례금 4만원, 수당 6만원, 식비 2만 1천원. 새벽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13시간 근무하고 중간에 쉬는 시간은 알아서 교대로 가져야 한다. 그렇게 받는 돈 12만 1천원.
이번에는 확진자 및 격리자 투표 때문에 사전투표 2일차와 본투표 마감 시간 이후 방역복을 입었다. 방역복을 입는 것에 대한 특별수당 15만원을 추가로 받았다.
1시간 30분 남짓한 시간동안 방역복을 입으면 하루종일 일한 것보다 더 큰 액수를 준다니 반갑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선택권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누가 방역복을 입을 건지 정하는 시간에 흘렀던 정적을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주민센터 직원이 많을지 모르겠고 이런 식으로 정적을 못 견디는 개인의 책임에 맡겨지면 안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확진자 및 격리자 분들의 선거권도 굉장히 중요한 권리이고 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누군가는 도와야 했다.
긴장됐다. 지난 선거 때도 확진자 분들이 투표하러 오셨지만이번과 같은 프로세스는 처음이었다. 선관위에서 알려준 매뉴얼대로 수행하자면 확진자분들이 밖에서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선관위에서 알려준 예상인원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대기하고 계셨기 때문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선관위에서 세운 확진자 및 격리자 투표 매뉴얼이 법과 규정에 어긋나는지 아닌지는 선거법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할 말이 하나도 없다. 다만 선거하러 온 분들이 불편하셨을 거라는 건 잘 안다. 지자체고 선관위고 이번 선거에 관여한 공무원 모두가 이런 투표는 처음이라 어설펐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선거는 준비의 부족한 점을 국민들에게 이해해달라고 할 수가 없다.
사전투표를 치르고 3일 뒤 진행하는 본투표 때는 시간을 분리해서 그런지 확실히 덜 혼잡스러웠다. 더 많은 인원이 온 사전투표 때부터 매끄럽게 진행됐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지만 20대 대선은 이렇게 끝났다.
제설 할 때는 제설이, 선거 할 때는 선거 업무가 제일 힘든 것 같다. 매번 제일 힘든 날이 갱신되는 나의 직장, 나의 돈벌이. 지칠 때도 많지만 내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와 같이 쓰인다는 점을 느낄 때는 보람도 쪼끔 있고, 하여간 마냥 싫기만 한 직업은 아니다.
자, 이제 6월 지방선거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