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다시 처음으로

by 미래

옷을 좋아한 건 사실이었다. 예쁜 옷을 보면 당장 살 생각밖에 없었고, 멋있는 스타일을 보면 꼭 따라 해보고 싶었다. 수없이 많은 쇼핑을 하며 내게 딱 맞는 스타일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넷 쇼핑을 하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떤 옷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지, 어떤 옷이 나를 더 돋보이게 할지 차츰 알아갔다. 여러 도전 속에서도 꼭 비슷한 옷들이 옷장 속에 꽤 많이 쌓이는 걸 보며 공부도 많이 되었다. 옷을 살 때는 아무리 예쁜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어도 가장 먼저 소재와 치수를 확인했다. 직접 옷감을 보고 살 수 없는 인터넷 쇼핑의 실패로 배운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모델과 다른 몸인 나는 화려한 조명과 정돈된 사진에 속아 가끔은 바지 길이가 짧고, 옷 품이 꽉 끼는 옷들도 많았다. 소재에 따라 화면과 달리 불편한 옷들도 꽤 있었다. 나와 맞지 않은 옷은 대부분 옷장에 처박혔다. 교환과 환불은 귀찮았고 오히려 더 수고로웠다. 돈은 아깝긴 했지만, 옷장에 있다 보면 결국 누군가는 입을 수 있었다.


옷을 만들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과 만드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 공부를 시작한 것은 맞았지만, 그것이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볼 때는 너무 재밌고 편했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편하고 복잡한 공부들이 많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옷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을 깊이 있게 잘 알기 위해서라면 직접 만드는 법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기도 먹어본 자가 잘 먹는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건 당연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디자이너를 꿈꾼 것은 아니었지만 패션디자인에 대해 배울 기회는 있었다. 대학 입시를 끝내고 여느 고3처럼 성적에 맞춰 원서를 냈다. 무엇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는 모른 채 그저 계급처럼 나눠진 학벌에 따라, 정해진 점수에 따라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꿈은 몰랐고 오직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성공이고, 꿈이라 여겼을 때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미술과는 거리가 멀었고, 미술 입시는 더더욱 해본 적 없었다. 그래도 성적에 맞는 학교의 패션디자인과에 원서를 넣었다. 점수에 맞는 학과였으니 당연하게도 합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진학하지 않았다. 대학 대신 재수학원을 택했다. 새벽부터 새벽까지 집과 학원으로 오가며 뭔지도 모를 내 꿈을 위해 1년을 더 버텨내었다.


어떻게든 새로운 학교로 입학을 했고 무사히 졸업을 했다. 다시 또 학교로 갔고 의상디자인을 전공하기로 했다. 돌고 돌아 다시 패션디자인이라니. 운명처럼 느껴졌다. 지난날 그때부터 패션 디자인을 공부했다면 달라졌을까 생각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생이었고, 좀처럼 어떤 인생이 다가올지 예상할 수도 없었다. 마치 하늘이 정해준 운명처럼 느껴졌기에 다시 학생이 되는 일을 놓을 순 없었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운명은 정해진 대로 따를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개척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웃픈 상황이 되어 의상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지만, 이 또한 변화가 무궁무진할 거라 믿고 있다.


이제야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계획대로 진행한 일들은 하나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나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매년 다이어리를 사고 절반을 쓰다 만 다이어리가 여러 개지만, 새해가 되면 늘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듯, 엉킨 실타래를 말끔히 풀어낸 것 같았다. 사실 엉킨 실타래는 복잡하게 꼬여있는 듯 보여도 알고 보면 쉽게 풀렸다. 실 한 가닥만 만져주면 풀어지는 경우도 많았고, 어떤 경우에는 이상하게 꼬여 있어도 풀어야 할 길이 쉽게 보였다.


인생은 참 알 수 없어서 불안하지만, 어떨 땐 잘 몰라서 재밌기도 했다.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하지 않나. 사랑이든 사람이든, 해야 할 일이든 숙명이라면 결국 다시 내 앞에 온다. 운명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다. 언제 올지 모르는 운명과 운을 기다리기보단, 어디서 만나도 당황하지 않기 위해 더 완벽하게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