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에 예수님 끼얹기
1세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네 번의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에 대한 이미지들이 철저하게 배신당한다. 작가는 그곳을 완전히 추악한 범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다.
작품 속에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경건한 종교의 도시가 아니다. 온갖 범죄로 얼룩진,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하드보일드 세계 그 자체다.
인간이 다스리는 로마가 그토록 정연하고 이성적인데 신이 다스리는 땅은 어찌 이토록 시끄럽고 혼란하단 말인가? - 1권 p. 115
익숙한 스릴러 장르를 1세기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인데, 그것이 왜 꼭 예루살렘이어야만 했는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정명 작가의 전작들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에 비해 상당히 새로운 시도를 한 것 같다.
확실히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연쇄살인 스릴러 한복판에 서 있는 건 묘한 광경이다.
어울리지도 않은 조합일뿐더러, 죄와 죗값이라는 닳고 닳은 하드보일드/스릴러 소설의 근본 논제부터 뒤집어버리기 때문이다.
스릴러 소설 속에서는, 이 더러운 세상에 희망이 있건 없건 간에, 누군가는 죗값을 치르고 사건은 해결된다. 영웅은 추악한 진실 앞에서 회의감을 느끼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정의는 실현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자만이 죄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같은 인간을 심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인공 마티아스가 여기에 반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하드보일드 세계 한복판에 있는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이자, 그 세계 자체기 때문이다.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없을진대 누가 악인을 정죄하고 죄인을 벌하며 흉포한 자들과 대적할 것인가? 그자는 죄를 심판하지도 못하고 창궐하는 악을 막지도 못한 채 죄인만 득실거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 1권 p. 126
하드보일드 세계가 예수님을 만났으니 충돌은 불가피하다. 작품 내내 그 둘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한다.
“(…)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기는 투쟁만 있을 뿐 신은 애초에 인간의 일에 관심도 없고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서로 욕하고 싸우고 굶고 병들고 죽어가며 발버둥 치는 인간들이오. 무언가가 바뀐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개개인의 욕망 때문이지. 그렇게 본다면 신의 말이라는 토라도 모호하기 짝이 없고 해석자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건 믿음이 아닐까요? 인간이 선하며 세상이 더 나아진다는 믿음 말입니다. 유일신 여호와는 그런 인간의 의지가 집대성된 인식체계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믿음 속에 실재하며 그들의 행위와 삶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 1권 p. 193
“전쟁에는 두 가지가 있어. 눈에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이지. 로마군이 이 땅을 말발굽으로 짓밟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영토가 아닌 믿음을 두고 싸우는 전쟁, 공간 위의 전쟁이 아닌 시간 속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르지. (…)" - 2권 p. 71-72
이 작품은 예수님이 개입하는 순간, 이전 스릴러 소설과는 다른 결말을 예고한다.
단순히 작은 정의에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죄인인 상황에서 인간들은 스스로의 정의를 실현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그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인간의 죄는 그 죗값을 치르는 대신 예수님을 통해 ‘공짜로’ 탕감 받는다.
따라서 주인공 마티아스의 최종 목표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것에서 끝날 수가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죄를 탕감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가 예루살렘을 택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하드보일드/스릴러 세계와 대척점에 서 있을 것 같던 예수님은, 사실 그 세계의 핵심적 문제인 죄와 죗값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캐릭터인 것이다. 어쩌면, 그만이 유일하게 그 문제를 논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풀어나가기 쉽지 않다.
예수님을 하나의 캐릭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의 인간 구원에 대한 목표를 훼손시키지 않고, 스릴러 소설로의 클리셰와 재미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힘든 외줄 타기다. 예수님을 스릴러 소설의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드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작품도 그 외줄타기를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했다.
우선 마티아스라는 이야기의 주인공과 이교도라는 최고의 적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 이야기가 어느 정도 강렬함을 잃는다. 왜냐하면 원래 이 이야기의 영웅은 예수님이고, 악당은 가롯 유다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역할도, 악당의 역할도 나눠 갖게 되면서 유다는 상당히 비중이 사라져버렸고, 예수님은 때때로 현실 회피적인 얄미운 캐릭터로 보인다. 원래의 영웅과 악당보다 새로운 이들이 더 강렬해 보인다. 장점이자 단점이겠다.
이야기 속 악당인 피슈카르는 제 역할을 하긴 하지만 약간은 뻔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또 다른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진짜 재미있는 갈등 축은 현실적인 하드보일드 세계관과 이상적인 기독교 세계관 사이에 있는데, 또 다른 종교가 악당으로 등장해버리면서 그 재미가 조금 반감됐다.
(마티아스도 종교인이긴 하지만, 그가 믿는 유대교의 교리는 묘하게 하드보일드 세계와 동일시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누구나 지은 죄가 있으면 자기가 갚아야 한다는 것,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되고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한 놈은 제 눈에서 피눈물 흘려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을 피하려 해서도 안 되고 피할 수도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아는 율법이었다. 사람을 죽였으니 죽임 당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였다. - 2권 p. 215-216
물론 작가는 후반부에 악당을 빠르게 제거하고, 마티아스의 심경 변화에 집중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용서를 받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심하는(정확히는 회개하는) 캐릭터만큼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힘든 것도 없다.
악당의 악행에 분노하고,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는 주인공에 우리는 쉽게 공감하지만,
자신의 악행에 분노하고, 죗값을 치르려는 주인공에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너무 고귀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기독교적 감정에 호소해야 하는데, 죄책감을 느끼려고 스릴러 소설을 읽는 독자는 드물다. 기독교적 전통이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십자형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티아스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때문에 작가는 마티아스가 애당초 그런 희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라고 설정해 놓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원래 가지고 있는 성격에 기댄다면, 다시 반대로 회심의 극적 효과는 반감되어 버린다. 쉽지 않은 해결이기에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은 이야기 내내 잘못된 수사를 하다가 막판에 제대로 감을 잡는다.
보통 스릴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패턴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잘못된 추리는 그것대로 일리가 있고 그럴듯한 느낌을 줘야 하는데, 언제나 독자의 추리보다 뒤처진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더군다나 중간에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계속 그러고 있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수밖에. 누가 봐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범인이 아닌데 자꾸 범인으로 모는 것이 약간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인공이 종교적인 선입견에 휩싸여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신뢰하기 어려운 주인공을 내세운다면, 독자는 누굴 믿고 사건을 쫓아간단 말인가.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실제 역사 속에 가상의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가는 콘셉트인데, 그것이 매끄럽지 못할 때가 많았다.
특히 예수님이 말을 할 때마다 거의 성경 속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데, 혼자서만 이질적인 말투로 말하고 있어서 어색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반대로 작품 속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할 때마다 어색하기도 했다. 그만큼 예수님은 다루기 조심스러운 캐릭터다.
작품 속 인물들이 드러내는 역사관, 세계관, 종교관이 상당히 후대 사람의 시야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당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려는 일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빌라도나 테오필로스가 로마라는 제국과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등장인물 각자가 품고 있는 음모나 계획이 지나치게 전체를 조망하는 느낌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은 극히 드문 법이다.
장르 자체를 다시 성찰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을 시도했으나 그 원대한 의도의 채 절반도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