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향기는 추억을 먹고 산다
비가 온다. 나는 비가 내린다는 말보다 비가 온다는 말을 좋아한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중력에 의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 밖에 되지 않지만, 비가 온다는 말은 비에도 의지가 있어 마치 비가 내게로 오기 위해 생겨난 것만 같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찾는 사람보다 나를 보기 위해 시간 내서 나를 찾아와 주는 사람이 반갑다. 고맙고 소중하다. 비가 온다는 것은 마치 당신이 내게로 오는 것만 같다.
제주에도 비가 왔다. 제주에 온 지 2주쯤 지났을 때였다. 항상 맑고 넓은 시야, 솜사탕 같은 구름이 떠다녔던 하늘에 갑자기 바다 너머의 먹구름이 몰려와 제주가 어두워졌다. 파도는 성난 듯 거세게 몰아쳤고, 바람은 주민센터 정문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찢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아침에 일어나 여느 때처럼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에 커피로 몸을 녹였다. 창문을 열고 오늘의 날씨를 살피는데, 왠지 하늘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줄 지어 이동하는 개미를 보지 않아도, 내 관절이 쑤시지 않아도 비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가 오기 전 그윽하게 다가오는 흙냄새가 풍겼다.
내 예상대로 점심쯤 되자 하늘은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굵은 빗방울을 흘려댔다. 처음으로 맞는 제주의 흐린 하늘은 보니 내 마음도 조금, 여행객들의 마음도 조금 울적해졌다. 평화로웠던 동화가 잠시 어둠에 잠긴 순간이었다.
비가 오면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많아진다. 드넓은 제주가 보이는 오름에 올라가 바람을 맞을 수도 없고, 바다가 하늘을 품어 땅에도 하늘이 있고, 하늘에도 하늘이 있는 순간이 사라지게 된다. 평온한 햇살이 비치는 숲길을 걷는 것도, 백록담의 정기를 가득 안은 한라산에 오르는 것도 위험해진다. 가끔 아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한 여행자들은 우비를 뒤집어쓴 채 성산일출봉에 올라가지만 이내 홀딱 젖은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성산일출봉에 갔다 온 소감을 물어봤다.
"이 날씨에 성산일출봉 올라가면 어때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들의 대답은 간결했다. 비가 오는 제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어둠 그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비가 와야만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제주에 와서 비가 오는 세상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넓은 창가를 가진 카페에 앉아 빗방울에 퍼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 안개가 드리우는 어둠의 공포, 비에 홀딱 젖은 그 상쾌한 기분, 오로지 비가 왔기에 느낄 수 있었던 그 감정들 또한 여행이었다.
그 중에 가장 여행답고 아름다웠던 것이 있다면 여행객들과 함께하는 '비 오는 날의 파전과 막걸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는 실연을 당한 사람들의 눈물을 모두 모아 흩뿌리는 듯 서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성산일출봉에 올라갔다 온 거지꼴의 그들을 보고, 또 창밖의 날씨를 보고 결국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덕분에 처음으로 게스트하우스에 눌러앉아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을 하게 됐다.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젠가 게임을 하다 보니 어느새 세 명이던 여행객들은 열명 가까이 모여 거실을 지배했다. 우리는 체스를 하고, 오목을 두고, 영화를 보고, 여행객들의 얼굴에 낙서를 했다. 내 눈은 고양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코 옆에 세 가닥 긴 선이 그어졌다. 거울을 보았다. 응?
놀다 지친 우리는 시계를 보았다. 점심때부터 신나게 놀았기 때문일까,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음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내린 하늘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들로 하여금 제주에 밤이 찾아왔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저녁 7시, 이제 밤이 드리우는 시간이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빗방울이 땅바닥에 부딪혀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여느 감성적일 때와는 다르게 막걸리가 마시고 싶어 졌다. 언뜻 들었던 제주, 우도의 땅콩 막걸리와 감귤 막걸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사는 이곳은 시장이 없었고, 저녁 7시면 주변 편의점 한 곳과 마트 한 곳 말고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막걸리는 살 수 있었으나 파전을 사 먹을 곳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언젠가 게스트하우스 사장 형의 친구가 만들어 먹던 김치전이 생각났다. 사 먹을 수 없다면 만들어 먹으면 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있다는 N포털 지식인에 '김치전 만드는 법'을 찾아보았다.
김치전의 비결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튀김가루와 밀가루를 1:1의 비율로 담고, 김치와 물을 넣어가며 농도를 맞춘다. 고춧가루를 뿌려주면 좀 더 감칠맛이 난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 뒤엔 누구나 텔레비전에서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식용유를 듬뿍 프라이팬에 두르고 김치전을 굽는다. 손이 가진 감각을 믿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한번 뒤집어주면 김치전 완성이다.
사장 형의 허락을 받고 곧바로 막걸리 파티를 준비했다. 이미 열 명도 넘게 모인 이곳은 모두가 같은 마음인 듯 분주하고 일사불란하게 상을 차렸고, 막걸리와 찌그러진 잔들이 상 위에 올라왔다. 내 역할은 이 파티의 메인 요리 '김치전' 담당이었다. 그 순간 나는 비장하게 손목을 풀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못 뒤집어요."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열 명이 넘는 여행객들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 앞에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김치전 때문이었다. 모두 꿀꺽 침만 삼키고 있다. 아마 지금이 내가 제주에 살면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 중 하나였으리라. 뒤집개로 살짝 김치전을 들어보니 프라이팬과 맞닿은 김치전은 바삭바삭한 그 느낌을 가진채 식감이 아주 절정인 상태에 달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건 내 손목을 믿고 프라이팬을 휘둘러 김치전을 뒤집는 일뿐. 난 식은땀을 느끼며 손목에 힘을 풀었다.
'스윽'
프라이팬을 살짝 들어 김치전을 아래쪽으로 밀리게 만들었다. 아래로 쏠린 기름과 그 사이에 기울어 지글거리는 김치전. 지금이었다. 나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공중에 떠오른 김치전은 아름답게 180도 회전하고서 정확히 프라이팬 둥근 모양에 맞게 안착했다. 성공이었다. 우리는 모두 환호를 질렀다. 이제 오늘 밤 파티를 즐길 일만 남은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때 여행객들의 환호와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광신도들이 신을 경배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게스트하우스에 처음 보는 무리가 들어왔다. 예약 손님도 없는 상태였고, 밖에는 비가 와 더 이상 손님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 명의 여성이 비를 많이 맞았는지 머리와 옷이 모두 젖은 채로 자리가 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추위에 벌벌 떠는 세 분을 데리고 얼른 남은 자리를 안내해주고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하라고 했다. 그들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고 '이제 시작해볼까?' 거실을 돌아보니 여행객들은 이미 막걸리 잔을 채우고 흠뻑 파티에 취해있었다. 이곳은 제멋대로의 우리 삶이 어우러져 더 아름다운 제주도였다.
난 그들에게 나 빼고 먼저 마시면 어떡하냐고 울상을 지으며 그들과 건배했다. 우리가 잔을 부딪히는 그 순간은 술이 아닌 마음이 부딪히는 순간이다. 비가 오는 날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가장 늦게 들어온 세 명의 여성이 샤워실에서 볼이 빨개진 채 나왔다. 샤워실을 나오면 바로 거실을 마주하는 구조라 그들은 우리 모두의 시선에 집중되고 말았다. 아까는 경향이 없어 살펴보지 못했지만 그녀들 중 한 명은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부담스러운지, 부끄러운지 얼굴을 숙이며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너무 급하게 들어온 터라 자신의 방이 어딘지 모르고 헤매었다. 허둥지둥, 어리바리.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아기를 보는 엄마의 미소를 짓고서 그녀들에게 다시 방을 안내해주었다.
방의 이름을 외워두라고 말한 뒤 다시 돌아가려 하는데, 그녀들을 보며 외국인 친구가 뭐라 말을 했다. 당연히 초등학교 수준도 안 되는 영어를 구사하는 내게 그 외국인의 말은 다른 은하에 존재하는 듯한 언어로 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들은 모두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내 앞에 외계인이 세 명 있는 기분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그녀들 중 한 명이 내게 저 파티에 참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생얼로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멘탈만 있으면 참석하실 수 있어요."
그녀들은 정말 생얼로 거실에 나와 자리를 잡았다. 마치 처음부터 있었다는듯 저 땅콩막걸리주세요! 하고 앞에 있는 막걸리 한 잔 시원하게 입 속에 털어넣었다. 그녀들은 예쁘장한 가면을 쓴 굶주린 하이에나 같았다.
늦게 온 만큼 그녀들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그녀들은 비가 오는 날에는 숲길을 걷는 것이 운치 있다는 말을 듣고 사려니숲길에 갔다가 심하게 내리는 비와 앞이 안 보이는 안개에 미궁 속에 갇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또 게스트하우스로 오는 길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우산이 모두 뒤집어져 홀딱 젖은 채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때 나는 성산일출봉에 우비를 뒤집어쓰고 올라갔다 온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들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리라.
늦게 온 그녀들은 자기소개를 했다. 외국인은 필리핀에서 관광 분야를 공부 중인 대학생이었고, 제주도를 필리핀에 알리고자 장학금을 받고 여행을 왔다고 했다. 이름은 안젤라였다. 두 명의 친구는 안젤라를 가이드하기 위해 함께 온 한국인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의 소개를 들은 내가 말했다.
"안젤라가 필리핀으로 돌아갈 땐 사려니숲길에 갇힐 뻔한 추억밖에 남지 않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녀들은 웃으며 안젤라에게 내 말을 영어로 번역해주었다. 안젤라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숲에서 길을 잃을 뻔한 것도 추억이 되겠지만, 오늘 이 자리를 추억에 남기고 싶어요."
그녀의 친구가 번역해 준 안젤라의 말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안젤라와의 시간을 추억에 남기고 싶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감명받아 웃으며 화답했다.
우리가 추억을 남기는 방법은 간단했다. 막걸리 가득한 잔을 부딪히고 시원하게 비어낸다. 그것 뿐이었다.
나는 안젤라를 위해 열심히 손목을 꺾어가며 김치전을 구웠다. 밤은 깊어가고 비가 쏟아졌지만 우리의 시간은 여행자들의 아름다움으로 물들어갔다. 안젤라가 땅콩 막걸리가 너무 맛있다고 애교 부리며 정말 취해버릴 때까지 마시려는 걸 말리느라고 고생한 것만 빼면 오늘 밤은 '김치전에 막걸리' 환상의 섬에서의 환상의 밤이었다.
해가 밝았다. 비가 오듯 아침이 왔다. 아침이 온다는 것은 비가 온다는 것과 같았다. 아침이 오자 마치 당신이 나에게로 오는 것만 같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서럽게 울어대던 비가 그쳤고, 다시 동화 속 세상으로 돌아온 듯 가을이 가진 깨끗한 하늘로 변해있었다. 어젯밤의 파티가 꿈 속이었던 것으로 착각할 만큼 제주는 하루아침에 완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때 안젤라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고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와 보낸 밤은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기억할까? 자신이 땅콩 막걸리에 취해 애교 부리던 모습을. 여행의 추억은 다양하다.
"조심해서 가요."
동화 속으로 돌아가는 안젤라와 친구들을 배웅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어젯밤 너무 즐거웠고, 제주에서 보았던 어떤 풍경들보다 이곳이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고마웠다. 나는 다음에 또 코리안 피자 먹으러 오라고, 안젤라가 오면 언제든 김치전을 뒤집어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어젯밤 막걸리에 취해 애교 부리던 안젤라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예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떠나는 자의 미소가 그렇게 아름다웠던가?
"선물을 주고 싶어요."
그녀들을 불러세웠다.
나는 작은 짐을 넣어두는 바구니에서 내가 찍은 사진엽서를 몇 장 뽑아 그녀들에게 선물했다. 안젤라는 말 대신 표정으로 제주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중섭거리에 가서 엽서를 몇 장 샀었는데, 그곳에서 구한 것보다 내 사진이 훨씬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누나들의 눈이 예뻐서 그래요."
내 사진은 예쁜 눈을 가진 당신들 덕분에 예뻐 보이는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안젤라는 내 엽서를 다시 내게 내밀며 뭐라고 이야기했다. 몇 번을 얘기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도 못하는 바보였기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인 부탁드려도 되냐고 하네요?"
안젤라의 친구가 말했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사인을 부탁받다니, 당혹스러웠다. 당혹감도 당혹감이었지만, 엽서에 뭐라고 적어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잠시 동안 고민하며 머리를 긁적이는데, 어젯밤 안젤라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늘 이 자리를 추억에 남기고 싶어요.'
나는 가장 아끼는 노란색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안젤라가 건넨 내 엽서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추억을 이 사진 속에 간직합니다. 필요할 때 꺼내보세요. - Mr. Chu'
그녀에게 내 엽서를 건네주고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더 내밀었다.
"안젤라에게도 저를 위해 사인해 주실 수 있겠느냐고 물어봐 주실래요?"
안젤라의 친구는 엽서 속에 적힌 말과 함께 내 부탁을 전달해주었다. 내 말을 전달받은 안젤라는 만년필을 빌려갔고, 사진에 긴 글을 적어 내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여행자의 길로, 다시 동화 속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준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Hi! I'm Angela from philippines. I'm really happy to be here in jeju. I like everything I see. Thank you for the beautiful memories.'
'안녕! 나는 필리핀에서 온 안젤라야. 나는 여기 제주에 있는 게 정말 행복해.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좋아.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줘서 고마워.'
그녀가 적어준 그 문장들 위에 어젯밤 기억을 얹어보았다.
'오늘 이 자리를 추억에 남기고 싶어요.'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줘서 고마워.'
그녀에게 우리는 정말 추억으로 살아갈까? 그녀가 남긴 말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오늘 서울에는 비가 온다. 안젤라와의 만남이 있었던 그날처럼 실연당한 모든 이들의 눈물을 모두 모아 흩뿌리는 듯 서럽게 쏟아진다. 나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몸을 녹였다. 창문을 열자 떨어지는 빗방울이 땅바닥에 부딪혀 퍼져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책상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사진들을 꺼내보았다. 안젤라가 제주에서 내게 적어주었던 엽서가 보였다. 1년 만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으로 정성 들여 적어 내려 간 그 문장을 읊어보았다.
'안녕! 나는 필리핀에서 온 안젤라야. 나는 여기 제주에 있는 게 정말 행복해.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좋아.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줘서 고마워.'
그녀가 내게 준 추억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보고는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서울 하늘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내게 오는 것만 같았다.
필리핀에도 이렇게 서럽도록 비가 오는 날이 있을까?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내가, 제주가 떠오를까? 그녀에게 우리의 향기는 진하게 남았을까?
진한 향기는 추억을 먹고 산다.
나는 비와 함께 그녀가 남긴 진한 향기가 잊히지 않았다.
'서울 하늘에 비가 온다. 당신이, 제주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