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소년 Sep 19. 2016

서울에도 가을이 왔잖아

가을이 왔다. 1년 전 처음 제주를 만났던 그 가을이

 오늘 아침은 빗소리에 잠에서 깼어. 창문을 열어놓고 자서 그런지 그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울리더라. 시계를 보니 새벽 6시인 거야. 주말 아침 기상시간 치고는 너무 이르단 생각에 이불속을 뭉그적거리고 있었어. 그때 당신의 문자가 왔어. 추석은 잘 보냈냐는 안부인사였지. 뭐 잘 보낼 것도 없는 추석이라 대충 둘러댔는데 당신이 그러더라고. 오늘 빗소리에 잠이 깼다고 말이야. 신기했어. 나랑 같은 아침을 맞이한 것 같잖아. 기막힌 우연에 호들갑이라도 떨어볼까 하다가 금방 잠에서 깨 비몽사몽 한 상태라 그냥 멍하니 빗소리만 듣고 있었어. 그런데 당신이 또 그러더라. 빗소리가 듣기 좋다고 말이야. 이 빗소리가 마치 가을이 오는 소리 같다고. 난 그 말이 참 좋았어. 마치 계절 대신 당신이 내게 가을을 선물해 준 기분이었어.


 비도 왔겠다. 고인 물을 바라보면서 그 물에 추억을 떠올리며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혼자 감상에 젖어 노트북을 들고 밖으로 나갔어.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에 빵을 먹으며 글을 쓰고 싶었거든. 밖에 나가 버릇처럼 하늘을 바라보는데 날씨가 너무 좋은 거야. 마치 동화 속에 존재하는 하늘이 있다면 이런 하늘이겠지 싶었어. 정말 당신이 내게 가을을 선물해준 것 같았어. 서울에서 이런 하늘을 1년에 몇 번이나 마주할 수 있을까 싶었다니까. 아직 두 달 밖에 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맑은 날은 정말 몇 번 없었거든. 그것도 이렇게 좋은 주말엔 특히나 말이야. 다시 집에 돌아가 노트북을 놓고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갔어. 어디 목적지는 없었지만, 가만히 흘려보내기엔 아쉬운 하늘이었거든.


 다시 돌아가 비도 왔겠다. 광화문 광장에 가면 물에 반영된 서울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 예전에 사진으로 본 적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도 땅도 없는 미지의 세계 같아서 꼭 한 번 보고 싶었거든. 갈 곳도 마땅히 없었기에 당연하게 광화문 광장으로 갔지. 시청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는데, 에스컬레이터 밖으로 정말 화창한 햇살이 들어오는 거야. 마치 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었어. 계단의 끝에 서 땅을 밟았을 땐 정말 그랬어. 가을 하늘을 머금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 이곳이 정말 서울인가 싶더라고. 햇살은 조금 뜨거운데, 가을바람이 그 열기를 식혀주는 거 있지? 이 상쾌함, 언젠가 간직하고 있던 추억 속의 바람 같았어.


 바람이 나무를 살랑이고 내 머릿결을 살랑이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거 있지? 어쩌면 내 마음까지 살랑이고 가 버렸던 것 아니었을까 괜히 설레기까지 했어. 마치 제주에서 느끼던 바람인 것 같았거든. 정말 눈만 감으면 제주라고 착각했을지도 몰라. 향수를 뿌리고 나갔었는데, 그 향수가 제주에서 자주 뿌리던 향수였던 거야. 제주 어디를 가도 그 향기랑 함께 였었기에 더 제주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추억이야. 바람도, 향기도.


 추억에 잠긴 채로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는데, 햇살이 뜨거웠는지 비는 이미 다 마르고 살짝 젖은 땅만 보이더라. 여기까지 온 게 헛수고가 됐지. 난 하늘도 땅도 없는 서울을 보고 싶었던 거니까. 그런데 그래도 괜찮았어. 그늘진 곳에서 글을 쓰고, 바람이 살랑였거든. 제주에서 항상 풍기던 향기가 느껴지고, 하늘이 이렇게도 화창하니 가을이 왔잖아. 1년 전 내가 처음 제주 땅을 밟고 광치기 해변을 걸을 때 내게 행운을 빌어준 이름도 모를 그녀가 나타날 것 같았어. 내게 처음으로 행운을 빌어준 그 사람 말이야.


 당신이 그랬지. 비가 오는 소리가 마치 가을이 오는 것 같다고. 그래, 정말 오늘 서울에는 가을이 온 것 같아. 이 햇살, 바람, 하늘. 모두 내가 처음 가을 제주를 만났을 때랑 똑같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눈 감은 채로 고요하게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어. 가만히 추억에 잠길 수 있게 말이야. 잠시라도 이곳이 제주라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게 말이야.

 그러다 찌뿌둥해지면 잠시 걸어 다니는 거야. 어디로 가느냐고? 어딘가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저 바람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 그러면 또 내게 행운을 빌어줄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지. 그 사람이 내게 "God Bless You." 인사하면 1년 전 그때처럼 나는 그런 행복감에 젖을 거야. 앞으로의 서울 생활에 행운이 가득할 거라는 이유 없는 행복감.


 그러니까 잠시 멈추어선 이곳을 떠나 다시 또 걸어야겠어. 제주에서도 그렇고, 서울에서도 그렇고 걷지 않으면 만날 수 없을 테니까. 내게 행운을 빌어주는 그녀도, 문득 갑자기 찾아온 달콤한 사랑도, 평생 잊지 못할 감동적인 하늘도 말이야.


 가을이 왔어. 1년 전 처음 제주를 만났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 가을이 서울에도 와 버린 거야. 어떡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제주에서 처럼 그냥 걸을게. 그냥 걷다가 그냥 사랑할게.


 '내가 제주를 사랑했듯, 그렇게 서울도 사랑해볼게. 그게 내게도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비가 오는 날의 제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