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핑크인데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둘이 지하철에 빈자리가 나자 너나 할 것 없이 투덕투덕 자리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 엉키고 설키며 사람이 빠져나간 지하철에 재빨리 올라탄 아이들은 빈자리를 향해 돌격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편하게 가려 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어른의 무게에 이기지 못했는지 거침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인파에 휩쓸려 서로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우왕좌왕하며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열차에 몸을 지탱하기 바쁜 아이들. 정리된 지하철 내부는 때때로 적막했고, 아이들은 내 앞자리에 서 손에 닿지도 않는 손잡이를 향해 손을 한 번 뻗어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싱긋 웃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어있는 임산부 배려석을 향해 뛰어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게임에서 승리라도 한 듯 여자아이를 향해 해맑게 또 조금은 멍청하게 그래서 더 귀엽게 웃어 보였다.
"거기 핑크야, 네가 임산부냐? 나와."
여자아이가 박력 있게 말했다.
남자아이는 잘 닿지도 않는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조금 전과는 달리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삼 대견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다시금 서로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한번 스윽 훑어보았다. 그러나 주말 지하철에 자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임산부 배려석 옆 그러니까 길게 늘어선 좌석 끝에 서 있는 봉에 쥐여주고는 서로 또 투덕대기 시작했다.
거긴 앉으면 안 돼. 나도 알거든? 그런데 왜 앉았어? 깜빡했다! 으구, 잘한다 바보야.
아이 둘의 귀여운 투덕거림에 귀를 기울이며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데 지하철 문이 열리고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한 청년이 아까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 쓴소리를 들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았다. 청년은 여자아이가 말하는 핑크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순간 아이 둘이 물음표 수천 개와 당혹스러움이 곁들여진, 마치 퓨전요리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투덕대던 아이들은 청년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의 응석과 투정 대신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청년을 노려보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그사이 한 정거장이 지나갔고, 한참을 노려보는 것으로 감정을 표출하던 남자아이가 굳게 다짐한 듯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청년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거기 핑크인데요?"
피식 웃음이 났다. 한 정거장을 지나칠 동안 뚫어지게 째려보다가 겨우 던진 한마디가 거기 핑크인데요? 라니. 아이들의 당돌함과 그 재치있는 한마디에 새벽 세 시 감성 터지는 에세이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도저히 책의 감성에 다가가지 못하게 됐다. 책을 읽던 시선을 돌려 다시 아이들과 청년을 바라보니 청년은 아이들이 말하는 핑크라는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인상을 한번 팍 쓰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이라도 하는 건지 그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청년의 무시하는 태도에 화가 났는지 아이들의 표정은 더 험상궂어 갔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거기 임산부 배려석이라고요. 아저씨가 임산부예요?"
청년은 남자아이 때와 같이 또 인상을 팍 쓰고 아이들을 쳐다보더니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상을 팍 쓴 그 청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는 것 정도일까?
씨발, 뭐래. 청년은 아이들에게 서슴없이 욕을 한마디 내뱉었다.
이전까지 귀여웠던 아이들의 대화와 당돌하고 선한 가치관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저 청년이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무력을 사용하거나 더이상의 험악한 언행을 할 경우 중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집중했다. 약자를 보호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고, 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청년의 욕설에도 굴하지 않고 더 거세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나오시라고요. 거기 아저씨가 앉는 자리 아니라고요. 아저씨 때문에 그 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앉지 못하면 아저씨가 책임지실 거예요? 아저씨 못생겼거든요? 임산부가 눈길도 안 주겠네!
청년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아이들의 언행은 동심과 선심을 드나드는 제법 매력적인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못생겼거든요? 임산부가 눈길도 안 주겠네! 누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멀쩡한 청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조금 무거워진 그들의 공기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또 한 번 웃어버릴 뻔했다.
청년이 다시 아이들을 위협하거나 욕을 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데 청년은 세 번째 인상을 또 팍 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칸으로 넘어갔다. 아이들의 승리였다.
끈질긴 요구로 청년을 끌어낸 아이들은 임산부 배려석 말고는 자리가 나지 않자 한 손으로는 좌석 끝에 있는 봉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신도림역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아이들이 잡고 있는 손을 보자 청년을 끌어내릴 때의 긴장이 서로에게 온전히 땀과 떨림으로 전달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아이들은 긴박해지고 무서워질수록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서로의 땀과 떨림을 느꼈을 것이다. 둘은 그때마다 손을 더 꽉 쥐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진 않았을까? 그것이 청년에게 끝까지 당신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고 소리칠 수 있는 용기가 되진 않았을까? 혼자가 아니라 둘이어서 가능했던 아이들의 선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아이들을 보고 자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살기는 하지만 어쩌면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천사들을 칭하는 존재가 아닐까.
아이들의 선한 가치관과 용기,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땀과 떨림은 잊고 싶지 않은, 어쩌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다.
혼자서 맞서기 힘든 순간에 당신 손 꼭 잡을 수 있다면, 온전히 내 땀과 떨림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