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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소년 Sep 04. 2016

미치도록 궁금하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침 아홉 시가 지났다. 핸드폰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한숨이 나오지만 참아본다. 대신 쓰게 웃어버렸다. 내가 그에게 주었던 건 무엇이었고, 그가 가진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게 남은 건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점점 사람이 무서워진다. 그러나 나는 이기적인 사람 같은 건 될 수 없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내 배려는 계속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다만, 당신도 계속 그런 사람일까? 궁금하다.


 '정말, 진심으로, 미치도록 궁금하다.'


 어젯밤 열한 시쯤 여느 때처럼 카페에서 글을 쓰고 마감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바람이 시원해서일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오늘따라 더욱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시간만 괜찮다면 작은 언덕에 올라가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적당히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그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잠시 눈을 감는다.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을 하염없이 만끽하다 눈을 떴을 때는 별이 쏟아지는 것이다. 밤하늘에 미소 짓다 보면 저 별들 중 하나가 반짝 빛나고서 내게 떨어진다. 나는 그 별이 다가오면 손에 꼭 쥐고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주에 있을 때는 자주 인사하러 왔으면서 왜 서울에서는 이제야 온 거야?"

 별은 그럼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 서울 하늘은 흐려서 너를 찾을 수가 없었어. 아마도 오늘처럼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여전히 너를 찾지 못했을 거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람만 불어도 제주가 그리운 사람이었다.


 제주의 그리움에 옅게 미소 지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길을 묻겠다며 우물쭈물 한 남자가 다가왔다.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고, 키는 180이 넘어 보였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이 급박했는지 부산은행과 경남은행이 어딨냐고 묻는 말에도 호흡이 고르지 못해 내가 두 번 정도 다시 되물어 봐서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경남은행이나 부산은행이 어디 있는지 물으시는 거죠?"

그는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이용하지 않는 곳들이라 이 은행들이 어디에 위치했는지 잘 몰랐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가장 가까운 곳이 한 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에게 구로역이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여기서 한 시간은 걸어야 나올 것이라 말해주었다.

 검색하던 중에 간간히 나눈 대화에서 그는 나를 서울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지 자신의 경상도 말을 못 알아들을까 말하는 내내 미안해하였다. 나는 웃으며 고향이 경상도 창원이라 괜찮다고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자 놀라며 자신은 마산이 고향이라고 그랬다. 마산 양덕동. 김태경. 부산에서 옷가게를 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그의 전부였다.

 그에게 한 시간은 걸어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당황스러워했고, 이내 이 상황이 내키지 않는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아주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정말 죄송하다며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뭐가 죄송한 걸까. 그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말을 되뇌며 부산으로 가는 승차권을 하나만 사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왠지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타국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여행자의 부탁 같았다. 일단 이유나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왜 그러시냐고 묻자 그는 핸드폰 케이스에 카드 하나 달랑 들고 올라왔는데,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아까 말한 은행에 가면 어떤 인증 과정과 서비스를 통해 현금을 조금 찾을 수 있다고는 하는데,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 생각대로 그는 난처한 상황에 부딪힌 여행객의 모습이었다.

 곤란한 여행객을 못본 척 할 수 없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버스터미널 홈페이지에 들어가 흔쾌히 내 돈으로 표를 예약해주려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버스터미널은 예약 후 발매기 또는 직원에게 예약했을 때 사용한 카드로 결제해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도 나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의 여행객이라고 해도 내 카드를 맡길 수는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그는 꼭 사례를 하겠다며 돈을 빌려줄 수 없냐고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당사자조차도 쉽지 않은 부탁일 것이다. 그의 부탁은 급박한 상황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부산에서 운영하는 옷가게의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메모장에 기록해두어라며 받아 적는 나를 기다려주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정보를 따위에 그에게 없던 믿음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그냥 나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여행하는 중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군가는 나를 도와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이 삭막한 사회에서도 사람을 꼭 믿고 싶었으니까. 나는 오직 믿음이라는 것에 의존해 그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테니까.

 은행에 들러 7만 원을 뽑아 그에게 주었다. 나는 그의 어떤 것도 보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냥 사람을 믿기로 했다. 아니, 사람을 믿고 싶었다. 그의 양심이 살아 숨 쉬길 바랐다.

 그는 내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를 팸플릿에 내 연락처를 적어두었다. 부산에 도착하면 이 번호로 꼭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시간을 생각하면 새벽 6시쯤이 될 거라는 말까지 해주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땐 자야 돼요."라며 편할 때 연락 달라고 했다. 그도 나와 같이 멋쩍게 웃으며 "그럼 9시에 전화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내게 다시 한번 고개 숙이고 역이 있는 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생각해보면 그는 수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무엇을 하러 서울 외곽 지역인 오류동에 왔으며, 그가 내 연락처를 적어갈 때 썼던 팸플릿과 볼펜은 왜 구비되어 있었고, 주소는 왜 사상구 17-1번지라고 밖에 말해주지 않았을까? 모든 게 다 촉박한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다는 걸로 이해하려 했던 나는 정말 옳았던 것일까? 나는 또 사람을 믿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던 건 아닐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기분은 그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었다.



 집에 도착하자 제주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가을 제주의 새벽바람은 살이 에리듯 몹시 차갑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모르고 이른 새벽 성산일출봉에 올라가 아침 해를 맞이하고 싶어 한다. 아마 낮에 돌아다닐만한 차림의 옷을 하고 일출봉에 올라간다면 추위에 벌벌 떨며 눈썹에 서리가 맺힐지도 모른다. 일출봉에 올라가면서 흘린 땀도 바닷바람에 식어버릴 텐데, 그 바람을 견디는 것은 마치 히말라야의 눈보라를 견뎌내는 일이다.

 그 눈보라를 먼저 몸으로 겪어보니 새벽마다 분주하게 일출봉에 오르는 사람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였다. 여행 온 그들에게 어쩌면 그 또한 추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추억이 지독한 감기와 함께 오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나눠줄 수 있는 것은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이 여행 중이었으니까. 여행은 항상 배려와 나눔이 함께 하는 법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는 게 이렇게 좋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운동선수였을 때를 감사해야 하는 걸까? 새벽 6시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었던 그 시절을 몸이 기억하는지, 나는 늦게 잠이 들어도 6시에 일어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 게스트하우스의 새벽을 가장 일찍 깨우는 것은 나의 역할이었다.

 일찍 일어나면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에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커피가 주는 온기와 향기에 몸이 따뜻해지면 창문을 열어 밖의 구름 모양을 살핀다. 그리고 화장도 안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일출을 보러 가는 민낯의 여행객들을 배웅한다. 그리고 섬사람인 걸 자랑하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은 구름 모양을 보니까 바다 위로 바로 뜨는 해를 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추우니까 조심해서 다녀와요."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하고, 옷차림이 너무 얇아 보이는 이들에게는 내 담요와 내 카디건과 내 패딩을 건네준다. 그렇게 내 옷을 받아 들고 새벽바람을 이겨내 황홀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제주의 일출을 보고 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느낀 그들은 추위에 얼굴이 상기된 채로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내게 건넨다. 그 순간 나는 그들의 미소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인다. 나는 내 배려가 그 사람들을 위한 것만은 아님을 느낀다.

 내 옷을 빌려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침을 먹고 다시 여행길로 나설 때 내게 작은 것 하나라도 선물해 주고 떠나곤 한다. 물론 제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선물의 내용이 아닌 마음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했다. 아침이면 카운터 한편에 초콜릿이라던가, 귤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소복이 쌓였다. 채워진 바구니에 미소 한 번, 그들의 웃으며 건네는 인사에 미소 한 번. 나는 아침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카디건을 돌려주지 않고 떠나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10월의 언젠가 내 카디건을 받아간 여행객 한 분이 옷을 돌려주지 않고 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 당연히 깜빡하고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반대로 내 배려가 처참히 짓밟혔다는 기분 또한 떨칠 수 없었다. 그 카디건에는 수십 명의 추억이 담겨 있었고 또 더 많은 추억을 담아 주기에 충분 했을텐데,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그 추억은 모두 공중에 흩뿌려지고 말았다.

 그 날 내 기분은 비가 왔다. 비와 함께 파도 또한 거세게 밀려왔다. 날카로운 바람도 동반했다. 폭풍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폭풍이 몰아치는 해변가에 서 있었다.

 그 카디건은 그냥 옷이 아니었다. 우리의 추억이었고, 제주가 주는 선물이었다. 나는 추억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 기억의 한 조각이 사라져버렸다.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제주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미안해 제주야, 미안해 추억아, 미안해요. 나와 함께 했던 사람아.


 추억이 공중에 흩뿌려졌어도 별이 쏟아지는 평화로운 밤은 찾아온다. 별 하나하나 내 추억인데, 오늘은 그 많던 별들 중 가장 반짝이는 별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까? 반짝이는 별, 제주의 추억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따뜻한 여행을 위해 선뜻 내 옷을 건넬 수 있을까?'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또 오늘 같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랬던 것 같다. 배신감에 젖어들었던 나는 절대 옷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내 배려를 짓밟았듯이 나 또한 당신들의 안녕과 부탁을 짓밟을 것이라고. 누군가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해도 나는 차갑게 거절할 것이다.

 "추워서 그러는데 담요 한 장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싫어요."

 그렇게 잠들었다. 어떤 난처한 상황에 부딪힌 여행객을 봐도 무심히 지나칠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 또 다짐하고 그때서야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새벽이 찾아왔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다짐하고 계획하는 사람은 절대 이기적인 사람 같은 건 될 수 없었다. 나는 새벽 공기를 온몸으로 견디려 하는 여행객들에게 어제와 똑같이 인사를 건네며 내 옷과 담요를 건네주었다. 그들은 아마도 성산일출봉 너머 제주가 품은 바다에 떠오르는 눈부신 아침을 보고 온 뒤 싱긋 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출 너무 멋있었어요. 옷 덕분에 하나도 안 추웠고요. 고마워요."

 그러면 나도 그와 같이 싱긋 웃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멋진 아침을 가진 섬에 와서 감기 걸리고 돌아가면 속상하잖아요."

 우리는 행복한 아침을 맞이할 것이고, 그 아침처럼 밝은 미소를 머금고 각자의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침대에 누웠다. 나는 과연 아침 아홉 시에 그가 거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깰 수 있을까? 헛된 기대와 실날같은 작은 희망을 품으며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아침 10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핸드폰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핸드폰을 열어봐도 부재중 전화 한 통 없다. '에휴...' 한숨이 나오지만 참아본다. 대신 쓰게 웃어버렸다. 내가 그에게 주었던 건 무엇이었고, 그가 가진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게 남은 건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점점 사람이 무서워졌다. 그러나 제주에서도 그랬고, 서울에서도 그렇고 나는 이기적인 사람 같은 건 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내 배려는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만, 궁금했다. 당신도 계속 그런 사람일까? 미치도록 궁금했다.


 '정말 미치도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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