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새벽 5시, 텀블러에 뜨거운 캐모마일티를 한가득 담아서 산책을 나선다. 산책 갈 장소는 한강변도 동네 공원도 아닌 종합병원. 한 번쯤 병원에 입원해 본 사람이라면 경험해 보았겠지만,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담당 간호사가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러 병상에 온다. 겨우 통증을 잊고 꿀 같은 단잠을 빠졌는데 새벽녘에 그렇게 풀썩 깨야하다니... 매뉴얼에 따른 절차겠지만 환자의 회복을 도우려는 건지 방해하려는 건지 괜스레 야속한 마음마저 들기도 한다.
몇 시간 뒤면 4박 5일 동안의 입원생활을 마치고 퇴원하게 된다. 이왕 이렇게 새벽에 깨어버린 참에 좀 걸어볼까? 조기 보행이 수술 후 회복애 도움이 된다 하기도 하고, 앞으로 얼마간은 구경하기 어려울 종합병원의 새벽풍경도 궁금해서 주섬주섬 병원 산책할 준비를 해본다. 한 겨울이니 실내라 해도 선뜩한 한기가 돌테니 추위를 달래줄 도톰한 수면양말을 신고 두터운 후드티를 숄처럼 환자복 위에 두른다. 텀블러에 뜨거운 차도 가득 담았다. 귀에 에어팟도 장착! 5일 내내 달고 다니던 무시무시한 굵기의 링거 바늘도 방금 뺐으니 한결 가뿐하게 산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음악 취향을 기가 막힌 알고리즘으로 파악하고 있는 애플뮤직을 켜니 Greenday의 <Las t night on earth>가 흘러나온다.
'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에 이 노래가 플레이되다니... 완전 찰떡이네'
화염 속에 내 모든 것이 타버린다 해도
당신께 내 모든 사랑을 보냅니다
두근두근 뛰는 나의 심장은 당신 것이에요
어떤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길래 지구에서의 마지막 날 화염에 휩싸이면서도 이렇게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화염 같은 내 뱃속 통증 좀 어떻게 해줬으면ㅜ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맥락 없는 잡생각에 머리를 내맡긴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1층 로비에 내려가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한낮의 소란함도, 병원의 차가움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카페의 향긋한 커피 냄새도 온 데 간 데 없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청소하시는 분들이 간간이 보이고, 이제 막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들의 베드가 검사실이나 수술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삶과 죽음의 위태롭고 날카로운 경계에서 힘겨운 순간을 견디고 있는 환자분들 모습에 철없이 나대던 나이롱환자(?)의 마음이 이내 숙연해졌다.
5개월 전 복부에 예기치 않은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하게 되었다. 주치의에 따르면 모양으로 봐서는 악성일 확률은 5%도 되지 않는다고 안심시키긴 했지만, 확실한 결과는 종양 제거 후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암은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수술 날짜를 잡고 나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보다 정교하고 회복이 빠르다는 로봇수술이라는 걸 하기로 했다. 주위에 비슷한 수술을 받은 지인들에 따르면 생각보다 아프지 않아 견딜 만하다고 이야기를 들은 탓에 간단한 시술 정도일 거라 가볍게 생각했지만... 마취에서 깨자마자 칼로 배꼽과 그 주변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몸을 뒤척일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술 전 관장과 수술을 위한 가스 주입의 후유증으로 배는 맹꽁이처럼 부풀어 있었고 뱃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모든 장기가 꼬인 듯 부글거리고 아팠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무려 48시간의 금식이었는데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물에 적신 거즈를 입에 올려두어도 타는 듯한 갈증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로봇수술은 수술 부위가 작다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큰 수술흉터까지... 그야말로 고통과 좌절과 멘붕 ㅜㅜ
매년 건강검진을 하고 나면 의사 선생님께 늘 칭찬을 들었다. 뭐 하나 안 좋은 수치가 없다며 앞으로 이렇게만 관리하면 100세 찍겠다는 말을 들었던 나인데... 지금의 이 상황은 대체 뭐지? 평상시 운동에 진심이고 늘 음식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라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는데, 대차게 뒤통수 한 방을 맞은 것이다.
주치의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수술 후 완벽하게 회복되기까지 2개월이 걸린다고 했는데 다음 주면 수술받은 지 꼭 두 달이 된다. 몸도 마음도 꽤나 긴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통증도 흉터도 하루하루 나아져갔지만 마음의 상처는 좀처럼 빨리 회복되지 않았다. 노화, 질병, 무기력, 우울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라 치부하고 자만을 떨며 사는 꼴이 밉상이라 벌을 받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퇴원 후 집에서 요양 중이었기에 시간이 넘쳐 났지만 우울과 무기력이 덮쳐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명색이 작가인데 쓰지 못하면 읽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집어든 책, 양귀자의 소설 『모순』 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무릇 인간이란 타인의 불행은 합당하다 여기고 나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서는 늘 부당하다고 악을 쓰는 얄팍하디 얄팍한 존재다. 소설 속 주인공 안진진의 어머니는 일란성쌍둥이다. 쌍둥이인 두 여인의 삶은 누가 봐도 부유하고 행복해 보이는 삶(진진의 이모)과 지지리도 가난하고 불행해 보이는 삶(진진의 어머니)이라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에서는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무료하고 정체되어 불행한 삶(이모)으로, 가난해서 늘 먹고살기 바쁘고 가족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여유 없는 삶을 사람 사는 맛 나는 행복한 삶(어머니)으로 그려낸다. 이토록 모순덩이리인 우리 인생 속에서 어떤 불행과 어떤 행복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늘 행복한 일만 가득하고 불행이라고는 없는 완벽한 인생은 결코 없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하나의 개념어에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 작가는 그 조합의 곡절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행복의 이면에는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는 행복이 있다. 두 단어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샴쌍둥이처럼 등을 맞붙이고 붙어 있다. 불행과 행복이 공존하기에 인생이 의미 있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진진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책은 역시 도끼였다. 작가라는 자가 이 단순한 듯 심오한 인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늘 나의 인생은 인스타그램의 사진처럼 팬시하게 빛나야만 한다고, 나의 불행은 분명 합당하지 않다고 떼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도, 가족 간의 갈등으로 심한 우울증을 겪었을 때도, 예기치 못한 큰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고 되뇌지는 않았을까.
입원 수속을 하며 2인실을 신청했지만 병실이 나지 않아 4인실에 배정되었다. 병실이 무척 넓고 시설도 좋아서 1인실 부럽지 않을 만큼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에다 수술 후 통증도 심했기에 옆 병상 환자분들과 인사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되는 병실 분위기가 편했다. 그러나 며칠째 같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오다가다 어쩔 수 없이 환자분들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나를 제외한 세 분은 모두 암 투병 중인 환자분들이었다. 야위고 창백한 혈색에 두건을 두르거나 모자를 쓰신 모습에 절로 숙연해졌다. 비교적 건강하고 젊은, 양성 종양 제거 수술을 받으러 입원한 환자인 나는 마치 다른 별에서 온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도 잠시, 차분하고 의연하게 치료를 받고 식사도 약도 꼬박꼬박 잘 챙겨 드시며 유난하고 고통스러운 투병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모습으로 병원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더더욱 큰 경외심을 느꼈다.
남의 행복이나 불행에 대해 주제넘게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된다. 깊이 없는 격려도 축하도 동정도 삼가해야한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삶이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모순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이며 진진의 말처럼 삶 속에 비슷한 양의 불행과 행복이 존재해야만 사는 것처럼 사는 의미 있는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새벽, 겉으로는 불행과 아픔이 가득해보이는 병원을 산책을 하며, 현실이 어떠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희망을 향해 평온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을 보며 불행의 동전 뒷면에 붙어서 존재하는 희망과 행복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 아직은 독한 한파와 칼바람이 몰아치지지만 다음 주부터는 봄기운이 완연해질 거라고 합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이번 겨울 건강하게 잘 지내셨나요? 위의 글에서 보신대로 저는 건강 문제로 오랜 기간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무서운 꿈을 연달아 꾸느라 긴 겨울잠을 자다가 이제 막 깨어난 것 같기도 하고, 필름을 잘라 편집해 버린 듯 이번 겨울이 제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작가도 건강해야 하지만 책과 글을 사랑하는 독자님들 또한 더더욱 건강하셔야만 합니다. 초롱초롱한 눈과 맑고 날카로운 집중력, 텍스트의 지루함을 인내할 체력은 훌륭한 독자의 필수 스펙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겨울이 너무도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저에게 가르쳐준 것들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아마도 이 겨울은 제 인생에서 편집되어 사라지기는커녕 영원히 잊지 못할 계절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곧 만연할 봄의 생명력처럼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훌훌 털고 행복과 불행이 완벽한 비율로 적당하게 섞인 살 맛 나는 2025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저도 다시 달리기 위해 슬슬 워밍업 해보렵니다. 관심과 격려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