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 박완서
오랜만의 고궁 나들이였다.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중화전을 스쳐 멀리 석조전을 배경으로 미술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한 오라기의 이파리도 걸치지 않은 나목들이 즐비하다. 차갑고 바싹 말라버린 겨울 공기 속에 앙상하고 덩그런 나무들… <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을 관람하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난 황량하고 쓸쓸한 나목들이 웬일인지 따뜻하고 촉촉하게 느껴진다. 박수근 기획전 중 역대 최다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예술을 향한 묵묵하고도 강한 열정과 작품에 온전히 녹아든 그의 생애와 품성을 흠뻑 느낄 수 있다.
그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십수 년 전에 읽었던 박완서의 『나목』을 다시 집어 들었다. 실제로 6.25 전쟁 직후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박완서와 박수근. 박완서 선생은 고독한 한 예술가가 정신도 물질도 참혹하고 곤궁했던 그 시절을 어떤 모습으로 버텨냈는지를 섬세한 필치로 기록했다. 그녀는 소설을 집필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전쟁 후 암담한 서울에서
술에 취하지도 않고
붓을 놓지도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살았던
그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었기에
소설을 쓰게 되었다.
6.25 직후,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생계를 위해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게 된 갓 스무 살의 경아는 속물 같은 다른 환쟁이들과 사뭇 다른 진짜(?) 화가 옥희도를 만난다. 소설 속 경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석지 않은 선량함으로 의젓해 보이며 바위처럼 우직하고 담담한, 진정한 예술가인 그를 사랑하게 된다. 중년의 가난한 화가이자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 유부남이지만 깊은 고독과 선한 열정을 가진 예술가인 그를 향한 경아의 동경과 연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쟁 중 끔찍한 폭격으로 인해 오빠 둘을 잃고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며 고목처럼 메말라가는 경아. 곤궁함으로 인해 생계와 예술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예술가 옥희도. 두 사람은 각자의 상처와 현실의 고난으로부터 도피하여 쉴 수 있는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주지만 결코 지속될 수 없고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이기에 그들의 만남은 쓸쓸하고 애잔하다.
며칠째 출근하지 않는 옥희도가 궁금해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그의 집에 찾아간 경아는 작업실에서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 그림을 발견한다.
나는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나무를 보았다. 섬뜩한 느낌이었다.
거의 무채색의 불투명한 부연 화면에 꽃도 잎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이 서 있었다. 그뿐이었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돌토돌한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부연 혼돈속에 고목이 괴물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한발(旱魃)에 고사한 나무 - 그렇다면 잔인한 태양의 광선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태양이 없는 한발. - 만일 그런 게 있다면, 짙은 안갯속의 한발...... 무채색의 오돌토돌한 화면이 마치 짙은 안개 같았다.
왜 그런 잔인한 한발이 고사시킨 고목을 나는 그의 캔버스에서 보았을까?
잎을 다 떨군 나무가 고목이라고 생각했던 20대의 경아가 중년이 되어 남편과 아이와 함께 옥희도 유작 전시회를 찾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枝)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똑같은 그의 그림이지만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경아는 그의 진심을 읽는다. 그는 고목이 아닌 나목을, 죽음이 아닌 삶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목은 차디찬 겨울을 묵묵하고 담담하게 견디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참혹한 시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소박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자신만의 투박한 듯 절제된 방식으로 쉼 없이 창조해냈던 박수근의 삶과 작품들은 누구나의 가슴에 먹먹한 일렁임을 남긴다.
팍팍하고 암담한 세상, 그래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는 것, 그 일상의 숭고함과 희망을 믿으라고… 바위처럼 담담하게 살았던 한 예술가가 한 세기를 거슬러 날아와 오늘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