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도 블랙박스가 필요할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by Minimum

만약 우리의 뇌 속에 컴퓨터 메모리칩 같은 게 들어있어서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다면... 그래서 어떤 특정한 기억이 그리울 때나 혹은 그때로 다시 돌아가 꼭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때 그 장면을 진실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떠올릴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더 행복해질까 아니면 더 불행해질까?


이십 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 후로...... 그 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 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험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주인공 치고는 성격, 지성, 외모 모든 것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모든 면에서 '평균치'인 토니 웹스터. 그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선생님들조차 혀를 내두를 눈부신 지성을 소유한 친구 에이드리언을 만나게 되고 절친한 사이가 된다. 토니는 에이드리언에 대해 남모를 선망과 경외심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전(前) 여자 친구인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폭풍 같은 질투와 분노, 배신감에 휩싸인다. 20대의 젊은 토니는 주체 못 할 감정에 휘둘려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분노와 저주를 담은 편지를 보내고 두 친구는 절연하게 된다. 몇 년 뒤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토니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무심히 세월은 흐르고... 노년이 된 토니는 젊은 시절 자신이 보낸 치기 어린 편지 한 통이 엄청난 파국을 불러왔음을 목도하게 된다.


소설 속에는 두 가지 편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진짜 실재의 편지, 또 하나는 토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두루뭉술 희미한 내용의 편지. 젊고 치기 어린 토니가 자격지심과 질투에 휩싸여 두 사람에게 퍼부은 신랄한 저주는 아마도 토니 자신에게 부끄러운 기억이었을 테고 그랬기에 토니는 그 편지를 잊고 살았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유리한 버전으로 윤색하여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그 편지를 보게 된 토니의 표정은 과연 어땠을까? 노년이 되어 다시 만난 베로니카는 토니에게 말한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들은 고등학교 시절 역사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토니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하고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하여 대답한다. 그렇다면 초점을 개인으로 바꾸어 개인의 역사인 ‘기억’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의 주인공 토니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에이드리언의 역사관에 대입해보면 토니라는 인간의 역사는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과 그가 썼던 저주의 편지와 같은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서 빚어지는 확신이 되는 셈이다. 역사 속 진실이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은 늘 계속되어 왔기에 새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을 통하여 평범한 한 개인의 역사인 ‘기억’에 대한 고찰을 하게끔 만드는 줄리언 반스의 예리한 필치는 가히 놀라울 뿐이다. 작품은 깊은 철학적 주제와 더불어 할리우드 영화를 버금가는 스토리, 허를 찌르는 반전까지 겸비하며 탁월한 가독성(Readability)마저 지니고 있다.


반스는 너무나 우아하고 통렬하게 우리 모두가 믿을 수 없는 화자이며, 기억의 정확함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에 의문을 던짐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 보스턴 글로브


인생의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만 어찌어찌 큰 사고 없이 일련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나름대로 자신의 행동, 특히 저지른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하고 윤색한다. 토니가 기억하는 편지와 진짜 편지가 다른 것처럼...

우리의 눈과 뇌가 블랙박스여서 언제든 돌려볼 수 있는 메모리칩이 내장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나아질까 아니면 나빠질까? 아마도 우리는 자신의 저열함과 부끄러움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행복했던 순간들을 생생히 다시 꺼내볼 수 있으니 부끄러움과 아픔에 대해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원제는 'The sese of an ending'이다. 결말에 대한 느낌 또는 끝에 대한 예감쯤으로 해석될 터인데, 영 마음이 가지 않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주인공 토니의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네 '평균치' 인간의 모습이다. 멋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기억과 인생을 조작하고 인생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며 매월 따박따박 고지서를 납부하고 주변 사람들과 고만고만하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 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를 납부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결말을 통해 노년에 나마 과거 자신의 실수와 부끄러운 자아를 깨닫고 통렬히 후회하고 반성하는 토니는 그나마 억수로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저지른 대부분의 실수는 대개 큰 사고와 파장 없이 지나가기 마련이고 우리의 기억은 사고가 나지 않는 차량이 탑재된 블랙박스처럼 이전의 기억을 지워버리기에...


결국 우리가 후회와 회한으로 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인생을 포기해버리지 않고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을 정확히 기록하는 블랙박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기 전에 자신의 양심을 우러러 죄책감이 들고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는 일은, 도무지 하기 싫은 숙제 같은 일이지만 기필코 치러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 기억을 조작하지는 않았는지, 상대방과 내가 기억하는 바가 다르지는 않은지... 꼭 한 번쯤 생각해보라고 작가는 말한다.

주인공으로서 매력도 없고 꼴도 보기 싫던 토니가 결국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치유되는 것을 지켜보며 묘한 동질감과 가슴의 일렁임을 느끼는 이유는 토니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처럼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불러올 수 있는 파국은 우리의 삶에서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작은 부끄러움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우리를 덥석 삼켜버릴지도 모르기에... 우리 모두는 아마도 시지프스처럼, 삶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고 또 생각하고 질문하는 그 힘들고 괴롭고 피하고 싶은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