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여행은 그냥 가는 거니까
이직 후 처음, 그리고 군 전역 후 처음 떠나보는 초장거리 여행. 이번에는 7년 만에 유럽여행을 떠났다. 재작년 중국 일주를 다녀온 뒤로 버킷리스트를, 특히 여행 관련하여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뤄볼 요량으로 도전적인 여행을 떠나보고 있다.
사실 직장인이 멀리 유럽 여행을 가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이번 여행은 열흘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가는 계획이었기에 회사의 허락을 구하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좋은 직장 선배들 덕분에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찍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4개월 전부터 별생각 없이 찾아본 비행기 표가 저렴한 탓에 여행 준비를 더욱 쉽게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단연 "오로라 보기"라는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짰다. 딱히 오로라가 내 버킷리스트인 이유는 없지만, 아닐 이유도 없다. 여행자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오로라를 보는 포인트로는 주로 캐나다의 옐로 나이프, 아이슬란드 등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유럽여행도 함께할 생각으로 노르웨이로 골랐다. 그래서 이번 여행지는 트롬쇠(Tromsø)로 낙점.
사실 오로라는 핑계고 유럽여행이 더 큰 목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작 트롬쇠는 1박 2일에 다른 도시에 훨씬 더 오래 있었으니. 그래도 그런 핑계가 있어야, 여행을 시작하는 계기가 있어야 본격적인 준비를 하게 된다. 매일 퇴근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게 일상이었던 나에게는 더더욱.
큰누나가 런던에서 오래 유학생활을 한 덕분에 나는 갓 스무 살이 된 해부터 런던에 비교적 자주 갈 수 있었다. 첫 유럽 여행지도 런던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런던에 대한 감정이 좋고, 익숙하고, 그래서 깊다. 이번 여행에서 런던을 무심코, 그리고 당연히 넣은 이유도 그랬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와 함께 피오르드를 보기 위해 넛쉘투어 루트를 짜고, 베르겐까지 계획에 넣었다.
그리고 지난 7년 전 유럽 여행에서 독특한 매력을 느꼈지만 체력이 고갈되어 깊게 둘러보지 못한 베를린도 함께.
그러고 나서 한 2~3주 동안은 계속 일정을 어떻게 최적화할지 검색했다. 여행지로 점찍은 도시들을 보는 경로가 매우 비효율적이라 비행깃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게다가 겨울 여행이라 많은 짐으로 항공사 이용에 제한이 있어 비용이 많이 올라갔다. 다행히 런던-트롬쇠 계절 직항 편이 있어 최적화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비행기표와 호텔을 모두 예약했을 무렵, 가장 친한 친구 빈에게 연락이 왔다. 본인도 유럽여행을 떠날 계획인데, 베를린에서 계획을 맞추어 함께 있자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너무나도 좋은 제안이었다. 혼자 여행의 최대 단점은 엄청난 숙소비와 식사 비용인데,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은 비용도 물론이거니와 열흘이나 혼자 있음으로 느끼는 외로움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베를린에서 친구와 함께 "놀" 수 있기에 좋았다.
그렇게 고대하던 출발 날이 되었다. 공항에서 본 26년 첫 일출로 이번 여행에 행운이 있기를 바라며 비행기에 탔더니, 옆자리에 프랑스에서 온 노부부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설레는 한국 여행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겠지. 나이가 들어서도 부부가 사이가 좋고, 그리고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일 것이다.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는 찰나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이륙 후 한 시간이 지났을까, 기내식이 서빙되기 시작한다. 첫 번째 기내식은 낙지볶음. 언제나 그렇듯 나는 생수와 구아바주스를 받고 함께 먹는다. 기내식만큼이나 구아바주스는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설렘이다. 기내식을 먹고 나는 잘 준비를 했다. 지금 자 둬야 시차 적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간식이 나오고, 두 번째 기내식으로 김치찜---마지막 한식을 먹으니 곧 착륙한다. 언제 쓸지 모르는 고추장을 하나 받아 들고, 저 멀리 바깥으로 해가 지는 하늘, 그리고 곧 보이는 런던의 야경.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 익숙했지만 낯설게 된 네 번째 런던이 기대가 됐다.
그리고 대망의 입국심사. 물론 한국 여권은 자동출입국심사라 심사관을 마주칠 일도 없고, 줄도 짧고, 시간도 안 걸린다. 2015년 처음 영국에 입국할 때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친구 식과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 입국심사를 어떻게 할지 공부도 하고 큰누나에게 물어보기도 했었다. 특히나 나는 당시에 영어도 정말 못해서 식이 다 해줬다. 그러다가 군 전역 후 2018년에 이탈리아에 입국할 때 유럽 국가로 입국할 때 자동 출입국 심사로 입국되는 것을 보고 국격이 몇 년 만에 높아짐을 체감했었더랬지.
입국심사를 지나 수하물을 찾고, 짐을 두 개 들고 다니기도 힘들고 분실 문제도 있을 것 같아 가방을 큰 캐리어에 넣어 하나로 만들어서 숙소로 출발했다.
몇 년 사이에 새로 생긴 Elizabeth Line을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방법은 Heathrow Express, Heathrow Connect, Piccadilly Line 뿐이었는데 Heathrow Express와 Heathrow Connect는 비싼 가격으로 주로 Piccadilly Line을 이용했었다. 다만 한 시간 넘게 작고 좁은 튜브에 타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었다. 게다가 2015년 첫 방문 당시만 해도 런던 지하철 파업으로 큰누나와 함께 런던의 상징인 Black Cab을 타고 이동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탄 것 같다. 당시에는 우버도 없었다)
Elizabeth Line은 이름 그대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이름을 따 지은 노선이다. 현재 국왕은 찰스 3세가 되어버렸다. 생각을 해보니 나는 왕도, 총리도, 물가도, 그리고 더 이상 유럽도 아닌 새로운 영국에 와있었다. 새로운 영국은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중국 일주 여행기도 써야겠다. 감상은 잊지 않게 빨리, 그러나 3개월이라는 긴 시간 간 만큼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유럽여행을 떠나기 전에 비교적 저렴한 비행기표에 현혹되면 안 된다. 진짜는 숙소비와 물가다.
7년 전 유럽여행은 정말 강행군이었다. 5주 동안 20개 정도 도시를 돌아보았다. 후회는 안 하지만 20대 초반이니까 가능했다.
AI덕분에 여행이 너무 편리해졌다. 예전에는 구글맵이나 가이드북으로 동선 짜고 맛집 찾느라 하루에 두세 시간은 허비했는데. 언젠가는 다시 그럴 때가 생각나겠지만 당장 편리함은 엄청나다.
대한항공 라운지 술 라인업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비행기 타기 전에 너무 많이 마셔버렸다.
낙지덮밥에 김치찜 기내식은 최고였다. 다만 간이 약간 싱거우니 고추장 받아 비벼먹으면 더 좋을 것 같다.
Elizabeth Line은 사실 우리나라 GTX의 벤치마크가 된 노선이라고 한다. 외곽에서 시내까지 대심도 전철로 빠르게 잇는다라는 콘셉트로, 파리에는 비슷한 RER이 있다.
영국의 진정한 상징은 사실 온수와 냉수가 분리된 수도꼭지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역사가 있는데, 과거 온수는 물탱크, 냉수는 상수도관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는데, 온수 물탱크에 균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상수도관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법적으로 분리를 하도록 했던 것이 현재까지 관습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