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1] | 익숙한 곳에서 느낀 낯섦

사실 낯선 것은 내 마음이었다

by 구민기

7년 만에 시작된 런던 여행은 나에게 설렘 그 자체였다. 어제 한인 민박 사장님께 받은 수동 열쇠도 내가 유럽에 있음을 한층 더 강하게 느끼게 했다. 문을 닫고 나오니 겨울의 런던은 확실히 추웠다. 그런 것도 잠시, 해가 뜨려는 여명과 런던의 상징 빨간색 2층 버스가 눈앞을 지나가는 풍경은 낯선 추위에도 확실하게 런던임을 느끼게 했다.

숙소에서 약간만 걸어가면 템스강, 거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웨스트민스터였다. 날씨도 좋으니 오늘의 여행은 관광지를 걸어서 둘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출발하니 바로 템스강이 나왔다. 그렇게 차가운 아침, 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뛰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유럽을 돌아다니는 내내, 심지어 북극이나 다름없는 트롬쇠에서도 러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춥다고, 피곤하다고 운동을 안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분들이었다.


조금 더 걸어 핌리코(Pimlico)역을 지나니 오늘 아침을 먹으려고 점찍어둔 식당에 도착했다. 아침은 영국에서 첫끼니니 당연히 잉글리시 브렉퍼스트(English Breakfast)로 정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따뜻한 손님들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장님을 포함해 대부분 직원들이 낯선 억양으로 손님들을 Amigo로 부르고 계셨다. 새로운 런던은 어쩌면 조금 더 국제적인 도시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식사를 끝낸 후 발걸음을 재촉해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했다. 빅벤은 내가 처음, 두 번째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볼 수 있었지만 세 번째 방문에는 보수공사로 볼 수 없었다. 지금 빅벤은 긴 보수공사 끝에 새롭게 개장한 빅벤으로, 밝은 황금빛으로 때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 트라팔가광장, 그리고 내셔널 갤러리를 감상했다. 특히 모네의 수련은, 유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세심한 붓 터치의 질감과 색이 오묘하게 섞여서 보이는 그 특이한 느낌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은 이래서, 실제로 보아야 그것의 느낌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급하게 본 내셔널 갤러리임에도 미술관에서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바로 이 미술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이 순간이 혼자 여행의 정점이 아닌가 싶다. 아름다운 전시실에 들어서서 공기를 느끼고, 좋아하는 그림이 있다면 멈추고,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을 나는 다시 감상하고.


발길을 돌려 나는 건물 뒤편의 초상화 갤러리로 향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 내셔널 갤러리보다는 초상화 갤러리에 흥미가 갔고, 다른 사람에게도 충분히 추천하고 싶은 공간이다.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 등 영국의 유명한 국왕과 역사적인 인물들의 초상화가 있기 때문에 사실 인물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해외에서 현지인들이 미술관을 즐기는 한국과 다른 방식이라 함은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영감을 받고 있는 것일까. 나도 다음엔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해봤지만, 그림을 워낙 못그리는 탓에 엄두가 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 또한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이겠지. 대신 나는 그림을 보며 생각을 떠오르고, 거기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한다. 지금 이곳에 여행을 정리하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런던 속에서도 변함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공간은 바로 런던 지하철이다. Mind the Gap 소리, 그리고 강한 영국 엑센트로 이야기하는 지하철 안내방송. 아주 빠른 에스컬레이터와 미세먼지로 가득 찬 뿌연 승강장. 7년 전, 10년 전에도 들었던 소리를 들으니 내가 아는 그 익숙한 런던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으로 이동했다.


런던의 또다른 상징과도 같은 세인트폴 대성당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런던 국교회의 중요한 성당이다. 시간이 마침 성가대가 연습을 하는 시간인지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보다 지하로 내려가니 익숙한 단어가 보인다. Korea. 한국전쟁 당시 영국에서 파병된 군인들을 추모하는 무명용사의 무덤이었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란 쉽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참을 앞에 서있으며 생각했다. 나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감사함을 느끼며 기도를 드렸다.

성당에서 나오니 해가 지려하고 있다. 저 멀리 노을이 지기 시작했고, 밀레니엄 브리지(Millennium Bridge)를 통해 템스강을 건너 테이트 모던(Tate Modern)으로 향했다. 폐공장에서 감상하는 현대미술이라니, 그야말로 그 자체가 런던스럽다. 발걸음을 재촉해 명화들을 둘러보며 테이트 모던까지 감상을 마쳤다.



Borough Market안에 있는 그리스 레스토랑 OMA. 미슐랭 1스타 치곤 가성비가 좋았다.

익숙한 미술관 세 개를 하루 만에 모두 돌아보기 전, 사실 민박에서 룸메가 된 지님과 함께 저녁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과감하게 미슐랭 레스토랑에 가보자고 했고, 흔쾌히 동의해주셨다. 덕분에 유럽에서 미슐랭 가보기, 소소한 버킷리스트도 하나 추가 달성.


익숙한 공간에서 느낀 낯선 이 감정은 다시 온 여행지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가도, 여행을 가야지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이 변한 런던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느끼게 했다.


오늘 내가 낯선 것은 사실 공간만 런던이고 알맹이는 다른 곳은 아닐까. 그리고 23살의 나와 30살 또는 31살이 되어버린 내가 다른 탓이겠지. 그때는 대학생, 지금은 직장인. 그리고 지금은 공간의 설렘과 시간의 느긋함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익숙함이라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내가 장소를 대함에 달려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런던의 지하철이 여전히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남은 런던에서의 이틀은 그동안 가보지 않은 곳들로 채우려고 한다. 익숙한 도시의 낯선 장소를 탐험하는 새로운 시간이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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