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2] | 취향 찾기

결국 중요한 것은 추가하기가 아니라 덜어내기이다

by 구민기

런던 둘째 날은 낯선 곳을 가보려고 했으나 중간에 뮤지컬을 보는 일정이 있기에 쇼핑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 고로 별생각 없이 둘러보기만 하고 돈만 쓴 하루가 되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도시 곳곳을 둘러보며 나만의 취향을 발견한 하루인 것 같기도 하다.


아침에는 토요일이니 노팅힐(Notting Hill)에서 열리는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으로 향했다. 20살 때 친구 식과 함께 런던에 왔을 때 봤던 곳인데, 10년 동안 취향이 확고해진 지금의 나도 좋아할까 라는 생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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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니 올리브 바가 보인다. 스무 살 때만 하더라도 샐러드고 올리브고 전혀 관심 없었지만 지금은 올리브가 너무 좋다. 신 맛이 나면서도 올리브 특유의 고소한 맛이 너무 좋아 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면 올리브를 잔뜩 올려먹을 정도. 에어비앤비나 호텔처럼 혼자 방을 쓰는 숙소였다면 여기서 올리브를 사 방에서 빵과 먹었겠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지라 먹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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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추워, 특히 런던은 바람이 너무 불어 체감 상 한국보다 훨씬 춥게 느껴져 따뜻한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어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몸을 잠깐 녹이며 다음갈 곳을 빠르게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날씨도 춥고 마켓을 잠깐 둘러보니 중고물품들이 크게 나에게는 흥미롭지 않았다. 그래서 따뜻한 실내에서 구경할만한 백화점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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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단 Harrods 백화점으로 향했다. 사실 쇼핑이 목적이 아니라 화장실 해결이 목적이긴 하다. 겸사겸사. Harrods는 19세기말에 지어진 백화점인데 안에 이집트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파라오 조각상들이 에스컬레이터에 있다. 영국의 백화점들, 특히 여기를 구경하다 보면 정말 고급스러운 백화점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일단 층 하나가 통째로 VIP전용이고, 입점한 브랜드 중 내가 살 수 있는 게 없다. 심지어 식품관도 정말 비싸다. 그래도 나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즐겁다. 개인적으로 옷을 보거나 향수를 맡으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리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길을 잃게 된다. 모든 방이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생겨 내가 어디 있는지 위치 파악이 안 된다. 모양을 생각해 보면 백화점이 왜 Department Store인지 알게 된다. 정말 Department로 나누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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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간이 다 되어 극장으로 왔다. 오늘 볼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보았던 그 뮤지컬이 너무 기억에 남았고, 특히 팬텀의 배경 음악과 함께 크리스틴이 부른 Think of me를 듣고 싶어 Cats와 고민하다가 이 뮤지컬로 골랐다.


그리고 오늘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느꼈다. 아, 나는 뮤지컬을 좋아했던 게 아니라 레미제라블을 좋아했던 거구나.


식과 런던에 왔을 때 레미제라블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나는 뮤지컬을 좋아한다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몇 번 뮤지컬을 보고는 그때만큼 크게 흥분되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는 런던에서의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행하면서 발견한 새로운 취향. 또는 삭제할 취향이다. 다음부터 뮤지컬은 굳이 내 여행 루트에 들어갈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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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다 보고 난 뒤 Regent Street와 Oxford Street, Picaddilly Circus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웬걸, 어두워지니 천사 불빛들이 켜지며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곳은 크리스마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웠지만 천사들이 따뜻함을 전해주는 듯 기분 좋게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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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을 겸, 뱅크시의 그림도 볼 겸 쇼디치로 이동해 펍에서 피시 앤 칩스에 맥주 한 잔을 먹었다. 당일날 다트 챔피언십이 있었는지 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TV를 보고 있었다. 영국에선 다트가 국민 스포츠인가? 펍에 있는 다트도 비어있는 시간 없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사용했다.


오늘 하루, 낮은 정신없이 보냈지만 밤은 무언가 아쉬웠다. 한국에서 밤에 놀 때는 항상 술이었으나, 술 없이 밤을 즐기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겠다. 밤을 즐기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뜨거운 커피를 즐기게 됐고, 분위기를 느긋하게 느끼는 방법을 배웠듯, 밤을 즐기는 방법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배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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