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결국 대화로 남았다
런던에서 트롬쇠(Tromsø)로 넘어가기 위해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공항으로 가는 히스로 익스프레스(Heathrow Express)를 타기 위해 패딩턴(Paddington) 역으로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버스 기사님이 방송을 하더니 승객들이 모두 내려 당황스러웠다. 기사님께 여쭤보니 다행히도 패딩턴 역은 간다고 하셔서 문제없이 도착은 했다만, 패딩턴 역 지하 승강장에서 히스로 익스프레스를 타야 하는데 지하 승강장으로 가는 길이 모두 막혀있었다. 바로 옆에 표지판을 조금만 더 빨리 봤으면 좋았을 걸, 표지판에는 새벽시간 히스로 익스프레스는 지상 승강장에서 출발한다고 쓰여있었다.
한동안 비행기는 화장실에 자주 가고 싶어 복도 좌석에만 앉았었는데 이번에는 북극으로 가는 만큼 풍경을 위해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북극권이라 여름에는 백야, 그리고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일어나고 있어 저녁처럼 어두컴컴했다.
착륙하면서 영상을 찍었는데, 옆자리에 친해진 중국 친구가 영상을 보내달라고 해서 흔쾌히 보내줬다.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축복이다. 외지에서도 이렇게 새로운 친구를 쉽게 사귀고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소소한 대화들이 풍경만큼이나 기억에 남은 것 같다.
시내의 풍경은 마치 겨울 왕국 같은 동화 속 도시같이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웠다. 고층 빌딩은 없었고, 툰드라 기후를 대비한 집 (사실 툰드라는 아니고 극한의 냉대기후 정도라고 한다) 들이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신장(新疆) 지역에서 엄청난 빙하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풍경에는 크게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도착하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신장의 그것은 자연의 위대함과 웅장함을 보여주며 자연 앞의 인간이 얼마나 작은 지를 보여주는 느낌이었다면, 트롬쇠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을 볼 수 있었다. 여건이 된다면 훗날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 스발바르 제도나 아이슬란드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국심사로 늦어진 점심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을 두 개 찾았지만 아쉽게도 모두 예약이 완료가 되었다고 하여 관광객용 식당으로 보이는 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GPT에게 도움을 받아 북극 대구가 들어간 생선 수프를 주문했다. 맛은... 생선의 비린 맛을 잡기 위해 새콤한 향을 추가한 크림수프와 그곳에 들어간 생선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내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식사 후 주변 카페에서 간단하게 커피를 한잔했다. 런던에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나 블랙커피만을 먹었었는데 (한국에서도 그랬고) 이곳에서는 여유를 좀 더 즐기기 위해, 그리고 따뜻한 분위기를 한 층 더 끌어올리기 위해 카푸치노를 시켜서 마셨다. 이상하게도 블랙커피보다는 카푸치노가 여유를 즐기기에 더 좋은 느낌이 든다. 시나몬 향이 가득 퍼지는 카페에서 몸을 잠시 녹인 뒤, 본격적으로 시내를 구경하러 다시 나섰다.
극야 탓에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트롬쇠 시내는 한 밤중처럼 깜깜했다. 왠지 모를 우울감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곧 출발할 오로라 투어에 대한 설렘으로 차 있었다.
저녁 여섯 시가 되어 오로라 투어 장소로 떠났고, 버스를 타고 약 30~40분 정도 바깥으로 나왔다. 이번 투어는 한국에서 유명한 Flexi Tour로 선택했고, 명성에 맞게 가이드인 Daniel은 매우 전문적이고 친절하게 오로라의 형성 원리와 오늘의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다. 데이터상으로는 오로라를 보기 비교적 좋은 상태이나, 구름의 상태가 다소 걱정된다고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구름이 없는 곳을 찾아 30~40분 정도 추가로 돌아다니다가, 괜찮은 장소에서 자리를 잡고 불을 켜고 오로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불을 켜놓고 투어에 온 사람들끼리 다양한 이야기도 했다. 같은 투어에서 한국 분이 나 말고도 네 분 계셔서 사는 이야기 등을 했고, 다른 싱가포르, 파리에서 온 분들과도 직업과 여행 계획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들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었고, 여행이라는 여유도 찾으며 행복을 찾고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유럽에서 일하는 분, 한 명은 교환학생, 한 명은 해외 인턴, 한 명은 나와 비슷한 직장인이었다. 5인 5색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리고 누군가는 조언을 구하고 조언을 하며 쉼터에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다. 각자 현실을 두려워하지만 행복을 기대하고 있는 거겠지.
나 역시도 행복을 찾는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다니엘이 준비해 준 머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사실 이 상황이 나는 그 자체로 즐거웠다.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너무 좋다. 오로라는 어쩌면 우리를 엮는 모멘텀 정도뿐이었고, 더 안 봐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셜미디어라도 교환할 걸 그랬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다니엘이 오로라가 보인다며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맨눈으로 관찰이 안되어 카메라를 켜서 노출값을 조정하여 사진을 통해 오로라를 보였는데, 점차 선명해져 맨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사진만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로라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보일 정도였다.
오로라를 본 뒤 아침 일찍 나는 트롬쇠를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1박 2일로 짧게 온 것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오로라 말고도 트롬쇠는 정말 할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은 곳이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길게 오기로 생각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오슬로행 비행기로 옮겼다.
꿈만 같던 하루였다. 오로라만큼이나 사람들이 기억에 남았고, 작지만 따뜻한 도시의 친절함과 독특한 풍경이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