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그리고 그 상황으로 내가 불안하거나 상처받거나 또 우울해질 것임이 예상될 때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의 어떤 심리 작용이 일어나서 그 상처를 최소화해서 내 마음을 지키려고 하는 움직임 그것을 말하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는 어떤 상황이 일어난 것 자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를 하는 것 등이 있다.
나의 방어기제는 무얼까?
나는 "분리", "무시"와 비슷하다. 책에서 찾아본 분리와 무시의 활자화된 특성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
고등학생 시절 삼 년 내내 단짝 친구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하니 J라고 하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간 학교에는 같은 반에 내가 아는 친구가 딱 한 명 있었다. 원래 깍쟁이 소리를 듣던 나는(지금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이 말을 들으면 절대 믿지 않는다. ㅎ) 친구가 없었다.
먼저 가서 이야기를 걸고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 웃고 날렵하게 빼빼 마른 J는 "너는 어쩜 머리를 항상 그렇게 동그랗게 잘 말고 오니?" 하는 말로 나에게 관심을 표현했었다. "깍쟁이" 였던 나는 "드라이를 해서 그래."라는 너무도 시니컬한 답변을 했고 나중에 그 친구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재수 없었다!" 고 했다.
시간이 지나 그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들과 나는 친해졌고 우리는 삼 년 내내 같은 반으로 서로의 집안 속사정까지 모두 아는 정말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와 내 성향은 너무 비슷했다. 겉으로는 세상 되바라져 보이지만 둘 다 혼전 순결주의 자 라던 지, 장래 희망이 현모양처이며, 나중에 레이스 앞치마를 하고 "아줌마~~"를 부르며 공주처럼 살고 싶다 던 지, 소위 말하는 영혼의 단짝이었다.
대학교를 각기 다른 곳으로 갔다. 서로에게 학교로 편지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주고받을 정도로 그리고 방학 때는 내내 함께 할 정도로 '죽고 못사는 사이' 였다.
세월이 흘러 둘 다 취직을 했다. 나는 마침 J의 집 가까운 곳에 직장이 있었다. J가 휴가인 날은 그 집에서 점심시간에 함께 밥을 해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왔다. 또 회사가 끝나면 함께 수영을 배우러 가고 밤늦게서야 헤어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남자 친구가 생겼다. 집에 대한 다른 가치를 가지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다.
셋이 한 이년을 어울려 다녔다. 어디를 가도 셋이 가고, 여름휴가도 셋이 갈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
언니 결혼을 얼마 앞둔 주말이었다.
내 기억에는 주중 언젠가 쯤엔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주말쯤에 우리 언니 드레스를 보러 가는데 같이 가자" 고 J에게 말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일이 생겨 주말에 드레스를 보러 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약속이 정확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굳이 주말에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변겡된 내용을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약속을 정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이 소위 남자에 빠져서였다라고 하면 할말은 없다.) 그리고는 남자 친구와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주말이라 데이트를 했다.
그 시절 남자 친구는 핸드폰이 있었다.(그때는 핸드폰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고 삐삐가 주로 있던 시절이다.)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J에게 전화가 왔다. 남자 친구 핸드폰으로
"어디야?"
"나 데이트 중인데 생일 선물 받았다~~"
"응 알았어"
짧게 대화가 끝나고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한참 자고 있는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삐삐가 왔다. J 였다. 부스스 일어나 마루의 전화기로 가 녹음 내용을 확인해 보니
"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종류의 여자야. 남자를 만나느라고 친구의 약속을 깨고 아무렇지도 않다니 정말 너를 세상에서 가장 경멸해"
머리가 윙 울리고, 멍 해졌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들어 본 가장 충격적인 말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 들었다. 조금 억울했다.
정확한 약속도 아니었고 그러면 주중에 한번 더 약속을 확인할 수 도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정확하게 딱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락을 안 했다.
진짜 우리는 비슷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 친구도 단 한 번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책도 가지고 있었고, 수영복도 내가 가지고 있었고 목걸이에 생활용품까지 서로에게 서로의 물건이 매우 많았지만 누구도 그걸 정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딱 분리하고 무시해 버렸다.
싸우고 다투고 악다구니하는 게 무서웠다.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인데 이런 무시무시한 과정을 거쳐야 다시 회복된다면 너무 마음을 많이 다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포기했다.
결국 내 결혼식에는 J 때문에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대학 동기들 몇몇만 참석한 채 단출한 결혼식을 치뤘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동안 대학 동기들과만 친분을 이어갔다.
대학시절 3년 동안 자취를 함께한 친구가 있다. H다.
H보다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석박사학위를 위해 공부하는 친구에게 가끔 만나면 몰래 용돈도 조금 남겨놓고 올 정도로 그 친구를 아꼈다. 먼저 잘 연락을 안 하는 H였지만 괜찮았다. 내가 하면 되니까.
서로 바쁘게 지냈지만 일 년에 한 번쯤은 콘도를 잡아서 밤새 놀고, 울고, 신랑들 흉보고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짧지만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냈다. 육아휴직도 한번 내보지 못한 내가 돌봄 휴직을 내고 엄마를 2개월이나 돌봐야 할 정도로 엄마는 너무 상황이 안 좋았다.
그 즈음 대학 동창들 중에 늦장가 가는 친구가 생겼다. 나는 참석하기로 했지만 갑자기 엄마가 상황이 나빠져서 참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H에게 엄마가 뇌종양 판정을 얼마 전에 받으셨는데 갑자기 상황이 나빠지셔서 못 가겠다고 하며 축의금을 부탁했다. 엄마가 아프신 상황을 알렸으나 H의 반응은 "응 알겠어"였다. 좀 더 위로를 받을 줄 알았던 나는 실망했지만 워낙 상황이 정신없어서 그냥 지나갔다.
몇 개월이 더 흘러 엄마는 좋아지시지 못하고 결국 돌아가셨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한번 해보려고 한다.) 엄마의 부고를 알려야 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대학 동기들에게 카톡을 날렸겠지만, 갑자기 너무 서운했다. 엄마의 뇌종양 투병 사실을 알리고 삼사 개월이 지나도록 나에게 엄마의 안부를 묻지 않는 H가 말이다.
또 나는 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피해버렸다.
어떻게 친구 엄마가 그렇게 아프시다는데 안부 한번 묻지 않았냐? 우리가 친구이긴 한 거냐? 하고 따져 묻고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울며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친구의 반응이 무서워 피해버렸다. 친구의 반응이 "미안하다"가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또 한 무리의 친구들과 연락을 단절하고 있다. 비겁하게 단톡방에는 들어가 있지만 존재를 나타내지는 않고 있다. 단톡방을 나옴으로 해서 내가 속이 좁다는 것을 보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올해 연초에 문득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 J가 잘 지내나 궁금해졌다.
할머니가 되어 레이스 앞치마를 하고 브런치를 하자던 그 말이 생각나고 다시 만나면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을 때처럼 편하게 단짝이 될 수 있을까? 당치도 않는 상상을 해봤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으면서 아직도 그렇게 용서와 이해를 못 할 일이 남아있다니 나는 아직 덜 자란 것이 틀림없다.
내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로 한 행동인데, 결국 내 마음이 다치지 않았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냥 아물지 않은 상처 그대로 오래도록 그냥 남아있는 것 같다. 정말 여러 번 J에게 연락을 해보려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못하겠다. 여전히 나는 아픈 말은 피하고 싶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이해심이 넓어지고 해결책을 알게 되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생각해보니 나는 20여 년 전 J와 싸우고 단칼에 연락을 끊은 그때의 나 그대로다.
이제야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는 말아야겠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만하면 모나지 않게 산 게 아닌가?
오늘은 그래도 괜찮다~~ 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 밤이다.
그리고 내일은 대학동창들 단톡방에 오랜만에 내 소식을 전하고 오랜만에 실없는 이야기나 나눠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