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던, 당신을 추모하며.

백세희 작가님, 고맙습니다.

by 이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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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에 축축한 길을 걸을 때면 바닥을 보고 걷는 버릇이 있다. 태백산 어디 골짜기 길을 따라 나 있는 우리집 주변을 걸을 때도 그렇고, 강아지와 자주 산책가는 언덕배기 공원을 걸을 때도 그렇다. 그 길 가까이에는 비가 오면 불어나 콸콸 쏟아지다가도 며칠 비가 그치면 금방 졸졸거리는 개울이 흐른다. 나는 그런 길을 걸을 때마다 항상 내가 밟은 길을 확인하고 걷는다. 혹시라도 개구리를 밟을까봐. 걸어가는 사람이 거슬려서 자고 있다가 폴짝 뛰어보지만 내 발바닥 길이만큼도 못 뛰는 덜 자란 개구리를.


축축한 낙엽과 풀이 흐늘거리며 바닥에 붙어있다. 발을 뗀 순간 작게 뛰어올라 어딘가 숨어버리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개구리를 여럿봤다. 가끔 운도 없게 이미 죽어있는 개구리도 많이 봤다. 어딘가 터져있거나 어딘가 찢어져 있거나 배를 보이고 있거나 셋 중 하나다. 해부시간의 알싸하고 독특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 건 취향이 아니라 고개를 금방 돌리지만 한편 연민이 마음 위를 떠돈다. 그많은 올챙이중에 살아 남아 이렇게 개구리까지 됐는데 어른 개구리가 되지 못하고 이렇게 됐구나.


자꾸만 개구리의 눈으로 내 커다란 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너무 징그럽다. 눌리는 순간 얼마나 괴로웠을까. 너무 과하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은 죽는 순간까지도 개구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지도 몰라. 그치만 죽는다는 게 좋은 느낌은 아니니까. 죽어서 의식이 없어도 몸은 남아 있을 거니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어떻게든 조심해서 피해가야지. 내 발로 그렇게 죽게 만드는 게 너무 싫다. 개구리야, 살아서 덩치도 커져보고 잘생긴 개구리도 만나봐야지. 아쉬울 게 없이 살아보고 다음 올챙이에게 개울을 물려줄 때까지 살아야지.




2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내가 한창 형편없는 기분에 휩싸여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던 시기에 뜨던 책이었다. 스트레스는 무섭다. 스트레스가 쌓여서 우울증에 걸리는 게 더 무서운 거라는 걸 몰랐지. 그때는 다 싫었다. 모든 말이 좋게 해석되지 않았고, 어떻게든 기분을 좋게하고 싶어서 식욕이 난동을 부렸던 때다. 나도 죽고 싶지만 너무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죽기 싫었던 건 아닌데, 그 시기엔 떡볶이가 정말 맛있게 느껴졌었다. 어쨌든...


그때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너무 싫다고 생각했다. 저 책은 우울을 벗어난 사람이 쓴 책일 것만 같았으니까. 시궁창같은 마음에 볕도 들지 않는 데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라면 글을 쓸 힘도 안 난다. 저 사람은 다 나았으니까 좋은 말해주려는 거겠지 싶었다. 나중에 가서야 글을 쓴다는 건 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 치는 행위라는 걸 알았다.


그 책의 제목만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 내 인생의 지독한 늪에서 빠져나와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됐을 때, 그 책의 작가가 세바시에서 강연한 것을 보게 되었다. 좋았다. 힘내서 말하는 그 용기가 부럽기도 하고, 그 어려운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기특해보였다. 내가 뭐라고. 아직도 우울한 자기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서 있고 어떻게 다룰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힘든 것을 숨기지 말라고 전하는 말에 진정성이 느껴졌다. 작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 힘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고, 전 세계에도 번역본으로 출간되게 되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우울하지 않다. 죽고 싶지도 않고 떡볶이도 가끔만 먹고 싶어졌다. 우연히 눈에 밟혀 마음에 새겨졌던 그 책의 이름도 희미해져갈 때였다. 그래, 그러던 어느날에 당신이 별이 되었다, 는 기사를 보았던 거다.


...왜?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한 글자를 떠올린다. 너도나도 똑같은 이유를 묻지만 그것은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일 때가 많다. 나는 생각을 접었다. 그게 무엇이든 그렇게 되었구나, 너무나 짧아서 아팠다. 심지어 당신은 사람을 살리고 떠났다. 그것도 5명이나. 전부를 주고 원래부터 그러기로 결정돼 있었던 것 마냥.


우울했던 나와 나보다 우울했던 나의 친구는 너무 삶의 무게가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30살까지만 살아보자고 서로를 다독였었다. 그래봤자 두 사람은 26살이었다. 4년만 더 버텨보자고, 30살까지도 힘들면 그땐 정말로 놔주겠다고 서로 약속했다. 2개월 뒤면 우리는 서른이 되고, 서른이 되기까지는 너무나 시간이 빨랐다. 친구는 살아있고, 행복하다. 30은 너무 적은 숫자였고, 짧은 숫자였다.


그렇게 옆에 세워본 당신의 나이는 서른 다섯이었다. 너무나 적었고 너무나 짧았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여기저기서 글을 올렸다. 당신의 책을 읽고 너무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었다며, 가장 힘든 시기를 같이 헤쳐나가 준 은인으로서 당신은 세상에 참 많은 따뜻함을 나눠주다가 간 거구나.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을 나눠주다가 조용히 떠나버렸구나. 이제야 겨우 읽어보게 된 글들이 조용히 인사해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잘 가요.


삶이라는 것이 답도 없이 바람으로 끝맺을 수 있는 거라면, 당신이 한 조각의 햇살 속에 오래 머물기를 빌어 드릴게요. 당신만큼이나 소중한 이들의 삶을 몇번이나 구원해준 당신이 천국에서 웃고 있기를 바랄거예요.


고마워요. 백세희 작가님.

-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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