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권목 Dec 02. 2021

여행 무식자

에세이_잠시 여행

6월 초였다. 가장 바빠지기 전, 미치게 여행이 가고 싶었다. 

반복되는 업무의 특성상, 해야만 하는 일과 변수가 뻔히 예상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오도카니 혼자 있고 싶었다. 

'내 자리'가 '아닌' 곳에서 '나'만 남을 수 있다면...

 

여행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시간과 돈을 쓰고 싶지 않은 아주 작은 부분. 

점점 겁은 많아지고 아무 일도 벌이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상태가 이어져 여행은 순식간에 먼 세상 이야기가 되었다. 삶의 유일한 낙이 여행이라던 지인들이 코로나19로 괴로워할 때도 그래서 괜찮았다.

 

어린 시절 한비야 작가의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최근 작가의 평판은 과거와 매우 달라졌지만, 이 시리즈가 아니었다면 그 많은 나라와 지역을 결코 몰랐을 것이기에 나에겐 의미가 있다.)을 읽으며 생각했다. 

'나에게 역마살이 있는 게 틀림없어!!'

15살 아이는 스스로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줄만 알았다. 틀렸다. 

지금까지의 한 손에 들어가는 경험에도 이는 결코 적성에 맞지 않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계획을 짜며 즐거워하다가도 이를 모두 실행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지쳐, 짧은 국내 여행에도 녹초가 되어버린 나.


그래서 15살 여행에 대한 로망의 부피는 

'마추픽추에서 스리랑카로, 스리랑카에서 동유럽으로, 동유럽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발리로, 발리에서 하와이로, 하와이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제주로, 제주에서 순천으로, 순천에서 강릉으로, 강릉에서 경기 외곽으로, 경기 외곽에서 서울 북 스테이로'

줄어들었다가 2021년 6월 다시 제주까지 커졌다. 

"그래, 제주 한 달 살기까지는 좀 그렇고 2주라도 살아야겠어!!"

이 다짐으로 6월의 나를 다독이며 기다렸다. 이번에는 꼭 실현하고 싶었기에 주위에 실컷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다.


까마득하지만 여행이 준 기쁨을 생각해보았다.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색다른 아름다움, 생활이 없는 상태에서의 온전한 휴식, 로컬 먹거리, 잠시 잊은 경제관념과 소비의 즐거움, 이 모든 것을 함께 느끼고 평소에는 꺼내지 못할 이야기를 맘껏 조잘댈 수 있는 여행 메이트… 

이를 생각하니 노력해서 얻는 '즐거움'을 애써 무시하고 노력이라는 '힘듦'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았구나 싶었다. 


2012년, 홍콩으로 첫 해외 자유여행을 떠났다. 

친구와 나 둘 다 해외여행이 처음이었기에 우리는 짧은 2박 4일에 각자가 꼽은 계획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그러나 8월의 홍콩은 가만히 있는 사람도 지치게 했다. 

돌아보면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여행이었다. 

우리만 납득할 수 있는 동선을,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며, 기계적으로 찾아가 짧은 감상을 했다. 

홍콩은 쇼핑의 천국이라 했으나 우린 돈이 없었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더위를 먹어 입맛을 잃은 채로 굶다시피 돌아다니다 겨우 도착한 숙소에서 신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나는 밀크티라도 원 없이 마셨지, 친구는 이마저도 향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포카리스웨트만 마셨다. 세븐일레븐은 우리의 구세주였다. 더군다나 예상치 못했던 호객 행위와 웃통을 벗고 다니는 수많은 남자들에 당황하여 긴장을 풀지 않고 다니느라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결국 말도 잃고 말았다. 


후에 친구와 여행을 되돌아보며 정말 실소만 나오는 여행이라고 웃었지만 결국 첫 해외여행이었기에 좋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다시 가라고 하면 쉬엄쉬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아쉬움은 있지만...

복잡한 동선으로 2층 버스를 타고 어느새 익숙해진 풍경을 각자 감상하는 것, 

늘 지친 상태에서 보았지만 어디에서나 여행을 왔다는 설렘을 가져다준 야경, 

서로 말은 잃었지만 갈등 없이 의지하며 함께 내린 많은 결정들, 

그리고 새벽 비행기를 기다리며 비로소 떠남이 아쉬워져 여기저기 둘러보았던 쳅락콕 공항이 솔직히 좋았다. 홍콩에서 찍은 사진은 모두 날아갔기에 이건 정말 내 기억 속에 남은 확실히 좋았던 것들이다.


그 이후에도 여행은 있었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고 홍콩에서의 배움을 잊은 채 

패키지여행인 터키에서도, 삼순이 따라 한다고 홀로 떠난 제주와 좋았던 책을 보고 또 홀로 떠난 통영에서도 건전한 강행군은 이어졌다. 

일상에서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구경하지 않고 잠시 앉아 있는 것은 왜 이리 힘든지...


그래도 작년 여름과 가을, 가족들과 떠난 짧은 강릉 여행에서는 잠시 즐거움을 맛본 것 같기도 하다. 

남들이 말하는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아니겠지만 뒤늦게 차곡차곡 나만의 것들을 쌓아가는 중이다. 

여행에 대한 온갖 찬사는 여전히 과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미치게 지겨운 일상이지만 대개는 그 변동 없음을 사랑하니까. 

그럼에도 어딘가를 꿈꾸게 될 때, 비록 그곳이 예상과 다르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시간을 보내게 될지라도 발 디뎌 보는 것이 낫겠지. 그래서 꼭 퇴사 후 바로 9월에 제주도에 갈 것이라 다짐했다.

(결국 못 갔다. 그래도 10월에 내 인생 최초의 긴 여행이 펼쳐졌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