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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Dec 03. 2021

그래_제주로

에세이_잠시 여행 1

제주로 떠나기 하루 전에야, 캐리어를 꺼내 펼치고 미루고 미루던 짐을 쌌다. 

모든 게 귀찮아졌다. 

생각나는 건 왜 이리 많고 가방은 왜 작으며, 나는 왜 아무 힘도 없는지…


답 대신 자꾸 이유와 자격을 캐물었다.

‘제주도에 3주씩이나 가서 뭘 하고 올 건데?’ 

‘그냥 가고 싶어, 떠나고 싶어!!’


심란함이 컸던 건 며칠 전, 전 직장 상사에게 일자리 제안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역시 계약직이었지만 급여도 더 높고 다른 부서 소속이지만 본래 팀으로 배정받을 수 있으니, 

더 좋은 조건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퇴직할 때도 느꼈지만 그이가 왜 날 좋게 봐주는지 모를 일이다. 

말을 너무 고분고분 잘 들었나… 직장에서 제일 싫었던 사람 원픽이 당신인데요… 

무튼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퇴직 인사를 하였으며, 

퇴직 후 한 달 반이 지나 그곳에서의 생활이 미화가 되었기에 좀 흔들렸다. 

물론 돈을 '쓴다는 것'보다 '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출근은 11월 1일이라고 했다. 

제주가 생각났다. 

인수인계까지 고려하면 일주일도 못 있을 제주. 

이미 여러 번 엎어지고 미뤄졌던 제주를 생각하니 빠르게 그곳에서의 좌절감들이 떠올랐다. 

비효율적이고 형식적인 시스템, 절대 자신은 틀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권위자들의 뒤치다꺼리, 

파워 ‘을’로서 모두의 비위 맞추기, 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냥 했던 일들…. 

그는 잘 생각해보라더니 30분 후 바로, 그토록 질색했던, 사람을 마구 쪼는, 독촉 전화를 해왔다. 

이제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을 의무는 없으니 받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짜릿하담. 

찬찬히 생각해보고 점심시간 전 전화를 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그가 진짜 미쳐버릴 까 봐 빨리 응답한 것이다. 

몸이 기억하는 이 고분고분함!! 


“OO님, 생각해주셔서 너무 감사한데 다른 일이 있어서 못할 것 같아요.”


그는 그때처럼 친절한 말투로 다른 일에 대해 샅샅이 캐물었고, 

나는 공손한 말투로 어찌어찌 그와의 전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전화를 마치고 나니 역시 거절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들어가면 헛구역질이 시작되겠지. 

최악의 직장이, 최악의 직장 상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주저했지만 

끊고 나니 놀랍게도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 분명히 잘 마무리했는데 가기 전 모든 게 귀찮고 무거운 건 

비현실적인 선택을 해서일까, 

아늑한 집을 떠난다는 생각에서 일까, 

이 몸이 짐 싸기 조차 버거운 체력을 가져서일까, 

서울의 해결되지 못한 모든 것들을 던져두고 간다는 마음 때문일까…

다시 습관적으로 자격을 캐물었다. 

과연 내가 어딘가로 떠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돈을 쓸 자격이 되나...

하지만 제주에 가지 않는 것 또한 미뤄왔던 또 다른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건 제주에 가면 풀리고, 난 돌아오기 싫겠지.' 

애써 모른 척하며 짐을 쌌다.


10월 13일 드디어 제주로 가는 날, 

부모님은 짐 싸는데 이것저것 조언(참견)을 하고 

32인치 캐리어를 보더니 어학연수 가냐고 놀렸다. 

억울하다. 엄마가 넣으라는 밑반찬과 쌀까지 가져가서 그렇잖아…(물론 아주 잘 먹었다.) 

마지막까지 모르는 사람 차에는 타지 말라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듣고 

26년 동안 산 동네와 4인 가족 체제에서 처음으로 빠져나왔다. 

공항에서는 사람들이 종종 이 거대한 캐리어를 가리켜 부끄러웠다. 


차와 비행기,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러 가는 여정.

심했던 멀미도 무거웠던 마음도 ‘HELLO JEJU’를 보고 사라졌다.

하지만 4만 원짜리 택시를 탄 후, 더 심해진 멀미와 두통… 

오후 6시 이미 모든 것이 깜깜해진 시간에 숙소에 도착하니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고생해서 꿀잠 잘 줄 알았는데, 제주에 왔음에도 우울한 마음과 바뀐 잠자리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초록빛 비상등이 강렬했던 새벽 숙소에서 널브러져 있다 제일 먼저 알아차렸던 건 

계속 밀려왔을 파도 소리다. 

그리고 완전히 눈을 뜰 수 있게 해 줬던 건 

서울 내 방에서와 같이 어둑한 푸름을 잔잔히 물들이기 시작한 주황빛 새벽하늘,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여기는 집 앞 내천 대신 바다가, 

산책하는 사람들과 개 짖는 소리 대신 파도와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제주로!!

이렇게 금방 마음에 들 줄 알았지.

다시 산책하러 나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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