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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Oct 29. 2022

11월 초겨울나기

에세이_'나'와 '생각들'

처음 재수 앞에서  비장해졌지만

이 비장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눈물은 찔끔찔끔 많이 흘렸다.

순진하게도 앞으로의 나날에 재수, 삼수를 넘어 N수가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울 일 아니야. 정말 별거 아니야.’하고 그때의 잔뜩 얼어 있는 나를 토닥이고 싶다가도

이제는 다시 그 비장하고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 빌려다 쓰고 싶다.


대학을 가기 위한 재수를 왜 결심하게 되었을까? 스무 살에 대학 가기 외 플랜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느 학교와 같이 학벌주의를 가르치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입시 공부 외 별다른 기술이나 재능이 없었기에, 

일단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고 보는 것을 최선이라 여겼다.

그렇게 학교 하나를 고정시켜 둔 채,

가고 싶은 학과만 자꾸 바뀌었다.

고정시켜 둔 학교는 모두가 인정하는 명문대였지만 그저 중학생 방학 숙제로 캠퍼스 투어를 했던 한 번의 방문으로 뿌리내리게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고등학생 때 꽃동네에 가서 봉사를 하다가, '무교이지만 수녀를 할까?'

맘에 드는 책이나 드라마를 보고, 

'작가를 할까?' 

사람이 궁금하거나 문득 우울해질 때는, '심리학과를 갈까? '

사탐 정치 영역 인강을 좀만 재미있게 듣는 날에는, '정치학과를 가야 하나?’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저렇게 포장을 하기 바빴다.

돌이켜 보면 어릴 적 의사 외 한 번도 고등교육이 필요한 직업을 꿈꿔 본 적이 없다.

사실 의사라는 잠시 스친 장래희망도

위와 다를 바 없다.

어릴 적 갑자기 무릎에 생긴 큰 사마귀를 떼러 갔다가 스친 단어.

사마귀 제거 중 생살이 뜯겨 피가 나는 것을 보고도

무표정으로 가만히 보고만 있는 나를 보고

의사 선생님은 가볍게 뱉었다.

"너는 커서 의사 해야겠다! 기절하는 애들도 많은데!"

했다.

의사는 그런 것만 같고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미래에 대한 나태함의 당연한 결과인지,

별 생각이나 목표 없이 살던 내게, 

수능이 끝난 고3 겨울은

정말이무언가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서늘함과 공포, 그래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으로 남아 있다.

수능을 망치고 수시도 다 떨어지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정시를 최대한 높여 지원했으니 소속될 곳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막막하고 붕 뜬 기분.

자연스럽게 재수를 하게 되는 건가 했으나

엄마는 이런 나약한 정신 상태를 파악했는지

아주 냉정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공부를 그렇게 할 거면 너를 받아 줄 공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직접 돈 벌어서 재수를 하든지 말든지 해.”

사실 지금 생각하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온실 속의 화초까지는 아니어도

비닐하우스의 무언가처럼 보호만 받고 자란

여리디 여린 나는, 

갑작스러운 양육자의 태도 변화가 

안 그래도 심약한 상태에 야박하게 다가와 서럽게 박혔고 엄마를 진짜 미워했다.


정말 다 떨어지고 설날이 왔다.

아무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파트 옆 동이라 가게 된 외갓집에서

이모, 이모부, 사촌 언니와 술을 마셨다.

명목은 나를 위로하고 기를 세워 주려는 것이라 했지만 

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술자리가 생겨서 그냥 좋은 듯했고

할머니가 끓여 준 청양고추가 송송 들어간 어묵탕은 ‘이 맛에 소주 마시는구나.’ 할 정도로

정말 얼큰하니 맛있었다.

그래 얼큰하니 취했겠다,

나를 제외한 이들에게 각각 라떼 시절의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수시 1차로 대학을 간 사촌언니 이야기는

언니가 뭘 알까 싶어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못난 기억만 난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주를 주는 대로 마시다 취해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이모부와 서로를 붙잡고 울었다.

이모부는 나를 보니 자신의 과거가 생각났는지 내게 자신의 대입 실패 및 진로 선택의 실수를 토로하였고 왜인지 모르게 이모부가 더 울어서 

나는 진정이 됐다.

우리 둘이 울든지 말든지, 

어느새 포차로 자리를 옮겨 잔치국수를 맛있게 먹던 이모는(자신의 언니를 무서워하는 이모는)

자기가 얘기했다고 말하지 말라면서, 

"언니가 재수를 해서 너한테 더 모질게 그러는 거야. 정신 차리라고."라고 말했다.

나중에야 그 마음을 짐작할 뿐이었지,

그때는 그냥 엄마도 할머니 돈으로 재수를 했다는 이야기로 들려 분하기만 했다.


 다음날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숙취와

퉁퉁 부은 얼굴에 괴로워하면서도,

새벽같이 술냄새가 진동하는 외갓집을 나와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았다.

어묵이 불어 쏟아내고 싶은 속과

따갑고 건조한 데다 퉁퉁 부은 얼굴과 달리,

속까지 시리게 하는 새벽 공기를 마시니 

 뻥 뚫려 울었다.

'이렇게라도 펑펑 울고 싶었구나.' 

어린 시절 누볐던 운동장을 도니

여전히 막막하지만 그래도 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렇게 재수가 시작되었다.

나는 '강북 메가스터디'라는 소속을 가지게 되었다.

시작 전 닿으면 차가울 게 뻔한 쇠창살 같아

유독 서러움이 가득했던 11월~1월과 달리,

조금 따뜻해진 2월에 시작된 재수 생활은

많이 미화되어 남아 있다.

어쩌면 가장 열심히 뭔가를 했던 시기여서 인지, 지금의 단짝 친구를 만나게 되어서 인지,

원하던 대학은 결국 못 갔지만 만족할 만한 대학에 붙어서 인지,

그곳에서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 늘 똑같은 이야기이지만 웃음이 나오는 시간들을 보내서인지,

오히려 지금이 그때보다 더 막막해서 인지 잘 모르겠다.

재수 생활을 끝내고 수시 발표까지

역시 차갑고 서러운 11월을 보냈지만

잘 마무리되었다.

동생은 내 사례를 보고

'재수는 그냥 시켜주겠구나.'를 깨닫고

물 흐르듯이 재수를 했다.

역시 첫째는 이래서 힘들다.

아빠 빼고 모두 재수생이었던 우리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추운 11~2월을 보냈다.


수능은 11월 둘째 주 목요일

(2011년 수능은 G20 정상회담으로 미뤄져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었다.) ,

대입 논술시험은 그 주 주말부터 다음 주 주말까지 이어지고,

중등임용시험은 11월 셋째 주 토요일에 있다. N번의 추운 겨울로 지금까지 꽁꽁 얼어붙은 11월을 보낸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고 집안 눈치를 보거나

시험을 보러 홀로 낯선 곳을 누볐던

11월의 생일쯤은

여전히 즐겁거나 기다려지지 않은 시간이다. 

괜히 한 번은 엄마랑 크게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엄마도 어느 한 구석에 겨울의 걱정거리가

자리 잡아 떠나지를 않나 보다.


올해 겨울도 많이 추울 것 같아

어떤 식으로 11월이 시작될지, 

지나갈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겨울나기의 경험으로

분명 이전보다 단단해진 것 같은데,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겨울이 오는 건  무섭겠지만

지나갈 수밖에 없는 시간인 것을 알기에

이번에는 좀 다르게 맞이해주고 싶다.

잠시지만, 지나가면 분명 공허할 테지만,

이번 11월은 이왕이면 따뜻한 연말의 빨간색을

더 오래, 크게 생각하고 싶다.

잠시라도 즐거우면 묘한 죄책감이 들던,

늘 의문이 뒤따르던 내 생일을

편히 축하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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