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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권목 Nov 06. 2022

달리 도망치기

에세이_심란

이상한 일이었다.

비둘기 대신 까치가,

이제는 까치 대신 까마귀가

곳곳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까치 한 마리는 까마귀 세 마리가 자리를 잡자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아파트 단지, 공원뿐만 아니라

식당과 술집이 즐비한 역 근처에서도

까마귀가 보였다.

편의점 앞에 자리를 잡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마치 이제 막 지구에 도착한 꼴뚜기 왕자 같았다.

깃털보다 더 빛나는 검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익히는 듯했다.

세상을 처음 마주해서 놀란,

그럼에도 이곳저곳을 알아가겠다는

5살 아이 같기도 했다.

이렇게 가까이, 오래 지켜본 것은 처음이라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곧

무슨 연유로 이곳에 정착했든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언젠가 침팬지 대신 까마귀가 이곳을 점령하게 되어 지금의 순간이 재난영화에서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프롤로그가 될지 몰라도, 

이제 막 이곳에 잠입한 세력은

어쩐지 안쓰러워 응원하게 된다.     


그래, 그날은 확실히 이상한 날이었다.

이처럼 까마귀 한 마리를 인지하고 지켜본 날,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었다.

며칠 전 태풍 예보가 있었고

기상청에서는 어제, 오늘, 내일 모두 구름이 가득하여 흐릴 것이라 했지만

막상 마주한 하늘은 어제, 오늘

모두 예뻐서 실망할 수 없었다.

새벽, 아침, 낮, 해 질 녘.

딱 바라던 하늘색에 어찌할 줄 몰라

어떤 곳을 향하다가도 이내 멈추었다.

하늘과 그것이 비추는 것들을 찍으며 웃었다.

답답하지만 마스크를 쓰고 걸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와 곤란했다.

정말 아름다운 날들이었지만

실은 어안이 벙벙한 날이었다.

원치 않는 마음을 잡아 뜯고 뜯다가 지쳐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유난히 달이 크고 밝아

이것저것 바라기 좋은 밤에는 더욱 그랬다.

이 밤들을 뒤로하고

‘에라 모르겠다!’ 가고 싶었던 곳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실은 그 사람이랑 가고 싶었던,

갈 것이라 꿈꿨던 낯선 곳으로

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럼 그곳에는 그 사람 대신

다른 사람들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 좋고도 슬픈 날에 이상한 까마귀를 마주했다.

언젠가 이 ‘꼴뚜기 왕자’에 관한

아주 슬프고 공허한 동화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까마귀를 보고도 피곤한 눈을 달래며

마저 속삭였다.     


‘어쩌다 마주친 오늘, 오히려 좋게 해 주세요.

아니 좋지 않아도 괜찮게 해 주세요.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원치 않는 콩깍지는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지만

바람대로 오히려 좋은 날이었다.

아주 많이 걸어 힘들었고,

땀이 나서 찝찝했고,

배고파서 많이 먹었다.

깔깔 웃는 척하다 정말 깔깔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깔깔거림은 언제든 금방

지나갈 시절 같은 것이기에

더욱 힘껏 깔깔깔거렸다.

이 원치 않는 애정은

흔적 없이,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자신 없지만 곧 지나갈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믿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이랑 같이 왔으면 어땠을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게 싫었다.

집으로 가는 길, 깔깔깔 그날이 사라졌다.     


난 늘 잘도 도망 다녔다.

불편한, 위험한, 불쾌한,

상황, 사람, 마음의 낌새가 보이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는

슬금슬금 도망칠 준비를 했다.

혹여나 쫓아올까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야 돌아볼 정도로

나의 안위에 민감했다.

그것은 나와 동생의 큰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우리는 참 잘 알아채.”
 “응, 뭐든 잘 못 믿지.”

“좋은 건가? 그래도 데이트 폭력이나 가스 라이팅은 안 당하지 않을까.”
“근데 언젠가 다른 식으로 크게 데일 것 같기도 해.”

“응, 너무 평탄했어. 과보호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래도 진짜 아니다 싶은 콩깍지에 쓰인 것 같으면 망설이지 말고 서로 뺨을 세게 때려주자!”

“그래, 좋아!”     


우린 이 평탄함을

과시하면서도 불안해했고,

창피해하면서 안도했다.

아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애써,

미숙해졌다.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도록

동생에게 이 아니다 싶은 콩깍지를 말해 볼까 하다

정말 뺨을 맞을 것 같아

이번에는 조용히 도망치는 것을 참아 보기로 했다.

이 이상한 날 전날에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밀려오는 것을 마주하고

때로는 달려가고,

마침내 보내기도 하는 여주는

사랑이 지나가자 비로소 편안해 보였다.

‘저 편안한 얼굴이 되고 싶다.’

그러니 도망치고 싶어도

꼭 도망치지 않기로 한다.

도망치고 싶은 것을 마주하려니

두 팔을 활짝 벌려 품지는 못해도

어색하게 어깨를 감싸고

토닥거릴 수는 있을 것 같다.

너무 힘들면 그저 두고 보기로 한다.     


그 사람을 똑바로 마주하는 날에는

긴가민가 한다.

좋아할 만한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아닌가 하면

자꾸 뭐가 보이고 생각났다.

같이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것들을 헤아리며

나를 맞춰 보았다.

내 취향이 아닌 시답지 않은 농담과 헛소리를 곱씹으며 흔들렸다.

이제 좀 편하고 쉬운 것을 하고 싶은데,

정말이지 꼬실 자신이 없는데,

쿨하고 가벼울 자신이 없는데,

미래 같은 건 보이지 않는데... 하며

그 사람이 듣지 않을 것 같은 노래를 들었다.

<새삥>(Prod.ZICO)(Feat. 호미들)

지겨울 때까지 노래를 들으며 빌었다.


“대자연님, 부디 헌삥 말고 새삥을 주세요.”


종종 드라마에 나오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심란한 일이 생겨(주로 실연) 잔뜩 술에 취해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클럽에서

마구 몸을 흔들어 재끼는 인물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저녁 8시 횡단보도에서 <새삥>에 맞춰

몸을 흔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본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둬보기로 한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부끄러울 만큼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야지 했는데,

이상한 까마귀 이야기는

그 이상한 사람에 대한 이상한 글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언젠가는 거부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지금 품고 있는 이것이 어떻게든 박살 나는 날,

이 글을 시원하게 업로드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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