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카고>를 96년생 여자의 시선으로 읽다
*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 글은 하나의 물음에서 출발한다.
왜 록시는 애초에 실력으로 승부하지 못했을까?
록시는 무대에 세워주겠다는 내연남의 말이 그저 자신과 '자기' 위한 허풍이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해 그를 쏴 버린다(!) 덕분에 그는 살인죄로 기소되지만, 일명 '미녀 살인범'으로 스타덤에 오른다. 시카고의 신문은 온통 록시의 이야기로 도배된다.
그는 살인죄로 인한 교수형을 피하기 위해, 혹은 스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위해 미모와 섹슈얼리티를 적극 활용한다. 덕분에 무혐의 처분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얻지만 처분과 동시에 새로운 '미녀 살인범'의 등장으로 세간의 관심은 거품처럼 증발한다.
이후 스스로의 실력으로 무대에 서기 위해 오디션을 전전하는 록시. 하지만 이미 그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시카고 여성 범죄자'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때 록시보다 조금 앞서 이 모든 과정을 겪은 재즈 스타 벨마 켈리가 다가오고. 마침내 둘은 오직 퍼포먼스 만으로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는 데 성공한다.
록시가 외모를 평가받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이 영화는 보는 이에 따라 여성 혐오적인 영화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록시에게 자신의 외모를 활용하는 것 외에, 얼마나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졌을까?
록시를 보면서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 공부를 잘할 것을 꽤 요구했다. 그런데 공부를 잘해야 하는 이유로 든 근거가 이상했다. '공부를 잘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가 아니라, '공부를 잘해야 엄마처럼 무시 안 받는다'였다.
엄마는 공부를 썩 잘했으나 오빠 두 명을 대학을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이 아닌 취업전선에 뛰어들기를 강요받았다.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은 그의 오래된 콤플렉스였고, 그는 첫 번째 자식이자 자신과 같은 여성인 내가 똑같은 결핍을 겪을까 많이도 애달파했다.
'나의 결핍을 네가 대신 채워달라'는 식의 기대가 폭력적이라고 느꼈으나, 이제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식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처지에 더 마음이 쓰인다. 사실 엄마의 콤플렉스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본인이 직접 공부해 대학에 가는 것이겠지만, 엄마는 아마도 나를 활용하는 방법밖에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큼만 꿈꿀 수 있다. 20살부터 반강제적으로 돈을 벌며 바쁘게 생계를 꾸리던 그의 주변에, 뒤늦게라도 공부를 시작해 대학에 간 여성이 얼마나 있었을까. 다들 '가족 (아마도 주로 남자 형제)'을 1순위로 두고 현재를 살아가는 동료들 뿐이었을 것이다.
록시 또한 비슷하다. 과연 그는 오직 실력으로 승부한 여성 스타를 얼마나 많이 봐왔을까. 어쩌면 그 시대 여성이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실력을 검증받기 위해 바로 오디션장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영화에서는 내연남)의 힘을 빌리거나 '예쁜 척', '귀여운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었을 테다.
바로 그 이유에서 록시와 벨마가 오직 퍼포먼스로 박수를 받는 엔딩은 카타르시스가 있다. 이는 벨마와 록시 개인의 성취이지만, 더 거창하게 말하면 시카고 여성 전체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제 시카고 여성들은 여성 또한 퍼포먼스만으로도 스타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더욱 다양한 여성 레퍼런스가 생겼으면 좋겠다. 더욱 많은 여성들이 각자의 꿈을 꾸면 좋겠다. 사회 전반에 가지각색의 케이스가 새겨지도록, 모든 여성이 각자의 속도로 그저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