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날 듣는 안개 낀 노래

런던 플레이리스트 2. 템즈강 - 런던 그래머 <Strong> 외 1곡

by 유월

영국에는 세상의 온갖 진기한 것들이 다 모이지만, 애석하게도 영국 오리진이 아닌 것들이 많다. 대영 박물관은 대영제국 시절 식민지 전리품들의 집합소요, 영국 음식은 맛 없기로 악명높지만 인도/서아시아 등 세계 음식을 탑클래스로 즐길 수 있는 곳이 영국이기도 하다(가끔 본토의 맛을 뛰어넘기도). 과연 영국에 가면 세계 여행 간보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법 하다.


그 와중에 런던에서만 볼 수 있는 런던 특산품이 있으니, 바로 안개다. 런던은 안개를 머금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우선 바다가 멍석을 깔아준다. 멕시코만 난류와 북극 한류가 도버 해협에서 정면 충돌해 안개를 무한 공급하기 때문이다. 뭐, 안개 잘 끼는 곳이야 많다 치자. 하지만 런던만큼 특징적인 풍경을 만드는 곳은 손에 꼽는다. 템즈강 덕분이다. 강 위에 낮고 두텁게 깔린 안개는 주변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안 그래도 탁 트인 강인데, 더욱 눈에 거칠 것이 없다. 다만, 강변에 런던 아이, 빅벤, 웨스트 민스터 사원 등 큰 구조물만이 희끗 보인다. 길이 구불구불해 어차피 눈길 닿는 거리가 한정적인 시내와 달리, 템즈강의 안개는 무한한 아득함을 느끼게 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하지만 신비로움도 하루 이틀이지, 런던 사람들에게 안개는 분명 일상의 불편이다. 안 그래도 우중충한 날씨에 안개까지 겹치면 잿빛 도시가 되버린다. 차도, 사람도 속도를 못 내고 비행기며, 주요 행사며 줄줄이 취소되는 등 금전적인 피해도 가져온다. 심지어 50년대에는 매연과 합쳐진 스모그로 4,000여 명의 사망자, 15만명의 부상자를 내기도 했다니 런더너들에게는 살벌한 자연 재해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여행자에게는 놓칠 수 없는 한 장면. 안개가 정신을 흩뜨려트리던 눈 앞의 것들을 지우개로 지우듯 없애고 나면, 비로소 나에 집중하게 된다. 미묘한 감정들이 살아나고, 있던 감정들은 깊이를 더한다. 런던을 여행하다 안개를 만난다면, 바로 템즈강 가로 달려가서 그 때의 감정에 집중해보자. 이 음악들과 함께.



다 쏟아내고 싶을 때 ㅡ 런던 그래머 <Strong>


첫 마디부터 습기를 잔뜩 머금었다. 물을 뚝뚝 흘릴 것 같다. 기타와 보컬에 리버브(a.k.a 화장실 에코)를 아낌없이 넣어 큰 공간감을 만든다. 피아노와 기타로만 이루어진 미니멀한 세션이, 마치 눈 앞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뭉게 버리는 안개 같다. 그 가운데 보컬 헤나 레이드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다가 점점 공간 속으로 확산된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주변에 적막이 흐르게 하는 보이스다. 안개 속에서 부르는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넘어, 안개 그 자체다. 2013년에 발매한 영국의 싱어송 라이터 '런던 그래머'의 싱글 <Strong>이다.


나 지금 슬럼프인데 좀 이해해주고 봐줬으면 좋겠어. 그동안은 강한 척 해왔는데 사실 힘들었거든. 내가 그렇게 크게 틀린 건 아니잖아


(직설적으로 요약하면 이런 가사. Ivor Novello Awards에서 가사로 상을 받기까지 했으니 그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가사 전문을 음미해주시길)


나름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은데 정작 사회로 나올 때쯤 주저앉아 방황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만든 곡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멘탈을 붙들고 있었던 듯 담담하게 시작하다가 중간지점부터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밤이 깊어지고 술 한 잔 마시면 나오는 속얘기들이다. 이 곡과 안개의 조합이라면, 시간대와 술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감정을 쏟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곡은 마지막까지도 어떤 버전이 출시될 지 몰랐을만큼 여러 버전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분위기며, 가사며, 만드는 과정까지 ㅡ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 그리고 안개 같지 않은가.



외롭고 불안할 때 ㅡ 제임스 블레이크 <Retrograde>


런던 그래머처럼 감정을 쏟아내려면 그 역시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럴 힘조차 없다면 제임스 블레이크가 제격이다. 깔끔한 보이스로 중얼거리는 듯한 창법은 불안하게 음 위를 부유한다. 목소리 자체에 떨림이 있는데, 애써 떨리지 않게 부여잡기보다 감정의 미동을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런데 <Retrograde>는 처연한 보이스와 멜로디로 호소하는 그런 흔한 발라드가 아니다. 시작은 보컬과 피아노가 주를 이루는 듯 하지만, 잘 들어보면 전자음이 점점 곡 전반에 비트와 리듬을 은근하게 불어넣는다. 런던 그래머가 리버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옅은 메아리를 만들었다면, 제임스 블레이크는 실제로 소리를 반복한다. 전주에서 샘플 추출한 제임스의 읊조리는 사운드가 곡 내내 깔리고, 곡의 전개에 따라 미세하게 변주하며 또 다른 사운드를 추가한다. 어느 순간 한 데 엉켜있는 사운드들을 듣다 보면 '언제 이렇게 쌓아올렸지?'라는 생각이 든다. 형체가 없는 신기루 같은 느낌이다. 신디 사운드로도 이렇게 불안함, 외로움, 더 나아가 허무한 감정을 만들 수 있구나. 그냥 찐득한 슬픔과는 다른 차원의 감정이 든다.


샘플링에 루프에 이펙터까지- 눈치챘을 수 있지만 이 어마어마한 소울을 내뿜는 제임스 블레이크는 사실 데뷔 초에는 일렉의 한 장르인 덥스텝의 차세대 주자로 이름을 알렸다. 초저역대 주파수의 베이스와 드럼으로 만드는 묵직한 사운드, 웝웝 거리는 우블 베이스라든지 갑자기 음을 훅 드랍한다든지 (이 곡을 들으면 뭔 말인지 느낌이 올 것이다. 장르도 장르지만, 1:30 쯤 오토튠 걸린 목소리와 지금 듣는 감성 충만한 목소리와의 간극이란.. 그 목소리 그렇게 쓸거면 나 줘..) 등 강한 음악을 하던 이가 갑자기 환골탈태를 하고 이렇게 섬세한 음악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앨범이 대박이 났다. 덥스테퍼 시절 음을 있는 대로 해체하고 갖고 놀아본 저력에서인지, 소울팝에도 어김없이 얄팍하게 깔리는 질감들이 그만의 고유함을 만든다. 전개가 예상되지 않고, 그래서 불안함이 증폭된다.


안개란 게 불안한 공기층 간의 충돌로 생기지 않는가. 이 음악과 함께 안개 속에서 한껏 불안해져보면, 더없이 허무해져보면 어떨까. 어쨌든 안개는 개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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