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뭐하지 고민이라면 재해석이 치트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하는 동시에 두려워한다." - 데릭 톰슨의 <히트 메이커스>
마냥 새롭기만 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하여 ‘낯선 익숙함'이 필요하다. 이미 세상에 나온 콘텐츠를 재해석하는 것이 낯선 익숙함을 만드는 치트키다. 소비자도 소화하기 편해 좋고, 크리에이터도 제로부터 만드느라 머리 쥐어 싸매지 않아도 되니 희소식이다. 재해석 콘텐츠가 범람하는 요즘, 잘 만든 재해석 콘텐츠 하나가 열 오리지널 부럽지 않을지도 모를 일. 남의 콘텐츠로 오리지널이 된 6개의 유튜브 채널을 보며 재해석의 지평을 넓혀보자.
(* 질문하는 어른의 유튜브 살롱, 유튜브코드에서의 대화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케미tv는 자막으로 철 지난 콘텐츠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중 발군은 '사랑과 전쟁' 편. 안 그래도 막장 드라마 특유의 중독성이 있는데, 관전하는 듯한 병맛 자막이 장르를 아예 예능으로 바꿔버린다. 리액션 잘하는 친구와 함께 드라마를 같이 보는 느낌이다. 또한, 1시간 분량을 10분가량으로 압축해 편집한 것도 몰입감을 높이는 데 한몫한다. 유튜브 시청자의 소화력에 안성맞춤이다.
공중파 영상을 마음대로 갖다 쓰면 당연히 안 된다. 케미tv는 KBS가 운영하는 채널이다. 2년 만에 300개의 영상을 쏟아낼 수 있었던 비결은 처음부터 다 만들 필요 없이 KBS의 기존 콘텐츠에 약간의 편집만 더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랑과 전쟁뿐 아니라 <추노>, <전설의 고향> 등 자막의 은혜를 입을 콘텐츠는 KBS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기존 콘텐츠가 가지고 있던 팬덤을 등에 업을 수 있는 것도 장점. 공중파가 온라인 탑골공원, 오분순삭 등 단순 큐레이션&클립화 정도로 그치다가, 서말쯤 되는 구슬을 이제야 본격적으로 꿰기 시작했다.
과거에 아무리 띵작이었다고 해도 지금 시점으로, 다른 플랫폼에 가져오려면 재편집이 필요하다. 이걸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콘텐츠의 가치가 재평가된다. 매운맛의 끝판왕이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도 사부작사부작 유튜브에 풀리기 시작했는데, 케미tv의 자막에 익숙해져서인지 이제 <내 남자의 여자>가 맹숭맹숭하게 느껴진다. 사실 <내 남자의 여자>가 각본으로 보나 출연진 클래스로 보나 사랑과 전쟁에 밀릴 것이 없는데 말이다. 적합한 재해석이 중요한 이유다.
자막만 덧대어 재해석한다는 맥락에서 디스커버리 코리아의 한국 현지화도 흥미롭다. 방영된 지 십수 년도 더 된, 그것도 해외 콘텐츠인 <베어 그릴스>에 유튜브향 자막을 입혔다. 해외로까지 눈을 돌린다면 재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케미tv가 원 콘텐츠의 영상과 음성을 살리고 자막만 더했다면, 장삐쭈는 음성을 아예 지워버리고 영상과 전혀 상관없는 병맛 더빙을 입힌다. 영상은 주로 70-80년대 애니메이션을 사용해 레트로한 반면, 더빙은 세상 트렌디하다. 최신 유행어 구사에 능하고 시의성 있는 소재를 잘 다루는 것이 특기. 장삐쭈는 급식체를 구사하는 신입사원의 일상을 다룬 '급식생' 시리즈로 공중파(SNL)에 진출하기도 하고, 비트코인 광풍이 불던 시절 '코인보감'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어 크게 주목받았다. 놀라운 건 수십 개 역할의 더빙을 장삐쭈 혼자 캐리한다는 것이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 영화나 드라마 캐릭터 성대모사, 심지어 BGM까지, 그야말로 더빙계의 괴물이다. 연기도 잘하고, 영상 전개를 보며 짜 맞췄을 더빙 대본도 (부조리극이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찰지다.
보통 재해석 콘텐츠라고 하면 오리지널 콘텐츠의 인기를 등에 업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장삐쭈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장삐쭈 채널의 주요 소비층은 10-30대로, 이들 대부분 70-80년대 애니메이션을 모른다. 그럼에도 장삐쭈 콘텐츠에 공감하는 데 전혀 이슈가 없다. 장삐쭈 채널에서 원 콘텐츠는 재해석과의 충돌 지점에서 그 빛을 발한다. 어린아이들이 볼 것 같은 애니메이션이지만 대사를 보면 어른용이고, 저화소에 옛날 그림체인 레트로한 영상이지만 대사는 트렌드의 최전선을 달린다. 옛것에서 향수, 추억이 아니라 고유함, 새로움을 느끼는 것이 현재 레트로 열풍의 핵심이기에, 레트로 ‘스타일’ 영상을 차용한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했다. 낯선 익숙함을 만들기 위해 꼭 인기가 많거나 사람들이 속속들이 잘 아는 원 콘텐츠를 활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패러디도 재해석의 대표적인 사례다. 원전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모방하되, 재미를 주는 것이 목적. 원본을 그대로 가져오는 케미tv나 원본을 몰라도 되는 장삐쭈와 달리, 패러디는 보는 이가 원 콘텐츠를 잘 알아야 의도를 가지고 비트는 부분을 알아차릴 수 있어 재미가 극대화된다.
'표절제로'는 상황 설정 자체에 트위스트가 있다.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속에서만 살아와 속세를 모른다는 자연인 카피추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데, 부르는 곡마다 잘 알려진 대중가요를 절묘하게 표절한 곡들이다. '보고 싶다', '달려라 하니', '아기 상어', '어머나', '몽환의 숲' 등 장르를 넘나들며 천연덕스럽게 베낀다.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가다가 예상치 못하게 훅 꺾어버리는데 힘이 탁 풀리며 웃음이 터진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진행 후 시청자들의 댓글 반응을 포함한 편집본을 유튜브에 올려 재미를 더한다. 댓글 보는 재미로 본다는 유튜브다운 편집이다. 음원으로 내달라는 성원이 빗발치는 가운데, 음색깡패 카더가든과 함께 한 '곽철용의 숲' 영상이 최근 업로드되기도 했다. 쓸데없이 고퀄이라 더 웃기다. 패러디 콘텐츠가 또 다른 오리지널이 되어 2차(3차)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또 다른 패러디 채널 '스튜디오 188'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저예산으로 재현한다. 원본의 장면 하나하나를 '저렴하게' 모사해 위아래 반으로 나뉜 화면에서 함께 보여준다. 어벤저스가 총출동하는 장면에서는 귀찮다는 듯 특징적인 사물로 인물을 과감하게 대체한다. 헐크는 오이로, 아이언맨은 당근으로, 캡틴 아메리카는 파란색 캔음료로 바꿔버리며 히어로들 어깨에 들어간 힘을 쫙 뺀다. 심지어 OST까지 직접 만든다. 최대한 허접하게. 이렇듯 제약을 주면 재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창의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각도를 틀어 벤치마킹하자면 몇 시간 짜리 영화를 3초 버전, 1분 버전, 5분 버전으로 만들 수도 있다. 또 한 콘텐츠를 순한맛, 매운맛, 인도커리맛, 중국 딤섬맛 등으로 바꿀 수도 있겠다.
'데이비드 마'는 흔한 레시피 영상을 스타일 확고한 영화감독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선보인다. <킬 빌>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미트볼 스파게티를 만든다면? 칼로 토마토 머리를 베니 피 같은 과즙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날고기를 무자비하게 치대고, 파스타를 부러트리는 등 슬래셔 무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카메라 구도, 움직임, 사운드, 색감, 챕터 분할까지 오마주했다. 이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웨스 앤더슨,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트랜스 포머>의 마이클 베이 버전도 있다.
영화감독의 스타일을 완전히 숙지한 것은 물론이고, 이를 어떻게 해야 음식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잘 알기에 가능한 연출이다. 사실 데이비드 마는 푸드 필름을 제작하는 스튜디오의 대표다. 이 영화감독 오마주 시리즈는 스튜디오 홍보를 위해 작정하고 만든 영상이다. 이 스튜디오의 기획력과 구현력을 남김없이 쏟아내 보여줬다. 이 영상들의 조회수로 짐작해 보건대, 기똥찬 영업사원이 되어줬을 듯하다.
각도를 틀어 벤치마킹해보자면 한국 영화감독 버전도 가능하다. 봉준호, 홍상수, 박찬욱, 나홍진 감독 스타일로 한국 음식을 만드는 영상도 재밌을 듯하다. 혹은 레시피 영상이 아니라 다른 분야를 접목할 수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취방 인테리어를 한다면 어떨까? 육아 콘텐츠를 만든다면? 화장품 리뷰를 한다면? (파우더 분 팡팡하는 마이클 베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유튜브 콘텐츠를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 방식을 잘 들여다본다면 3차, 4차 콘텐츠로 거듭날 수 있다.
'이매지너리 앰비션'은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우투 포맷을 따와 살짝 비튼 음악 채널이다. 원래 하우투 포맷은 실용성, 정보성을 제공하는 튜토리얼 영상이다. 기타 코드를 알려주는 등 좁은 범위의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이매지너리 앰비션은 실제 음악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기보다 음악의 특징적인 부분을 위트 있게 끄집어내 소개한다. 그래서 하우투+악기(How to Piano)를 넘어, 하우투+장르(How to Jazz), 하우투+아티스트(How to Daft Punk)까지도 광범위하게 결합할 수 있다.
이를테면 How to Joji 편에서는 일단 위스키 한 잔 마시고 시작하고, 샤워기 물 트는 소리를 에코 가득 담아 녹음한다. 술 김에 SNS에 올린 글이 가사가 된다. 몽환적이고 퇴폐미 넘치는 로우파이 힙합, 전직 유튜버다운(원래 조지는 개그 유튜버 필티 프랭크Filty Frank로 이름을 알렸다) 솔직한 커뮤니케이션 방식 등 조지의 특징을 나름대로 재해석해 담은 것이다. 특히 하우투+아티스트는 팬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수월하다. 보통 음악과 아티스트를 재해석한다면 모창, 비주얼 묘사, 편곡 커버 정도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방법은 다양하다.
해외 채널이라 대부분 해외 사례를 패러디했다만, '아이유'나 '트로트' 등 우리나라에 특화된 패러디를 해도 충분히 흥미로울 만한 시도다. 이를테면 하우투 아이유에서는 3단 고음을 만드는 과정을 위트 있게 풀어낼 수 있고, 하우투 트로트에서는 뽕끼 장착을 위해 뽕을 따먹는 연출 등도 가능하다. 하우투 뒤에 붙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디테일이 달라질테니, 덕질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시도해볼 만한 기획이다.
닷페이스의 '그거앎' 시리즈에서는 아프리카 돼지 열병을 파스타에 비유해 설명한다. 일반 돼지는 밝은색 파스타, 병 걸린 돼지는 어두운 색 파스타, 배설물은 소스(색깔 리얼..), 축사는 프라이팬, 항생제는 파마산 치즈 가루, 각종 바이러스는 향신료 등으로 대체한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을 설명하자면 공장식 대량 사육의 열악한 환경이나 돼지 집단 살처분 장면이 삽입되게 마련이다. 아무리 유익한 정보라고 할 지라도 5분 영상에 이런 장면들이 연속해 나오면 보기 불편할 수 있다. 그거앎은 불편한 실사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음에도 내용 전달력이 훌륭하다.
비유는 오랜 재해석 방식 중 하나다. 다만 비유의 목적은 그저 재미를 주거나 있어 보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잘된 비유는 전하고자 하는 바를 쉽고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그렇기에 관심 없거나 어렵거나 불편한 시사 이슈 콘텐츠에서 비유는 더욱 존재감을 발한다. 닷페이스가 슬라임으로 개헌을 설명한다든지, 키네틱 샌드로 기본 소득을 설명한다든지 등 소재 자체로 흥미를 유발하는 것도 쉽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도형이나 그래픽으로 점철되던 인포그래픽의 재해석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상에서 비유는 조심히 다뤄야 한다. 비유의 특성상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들어가게 되는데 자칫 콘텐츠의 흐름을 끊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나 라디오에서 한 두 대목을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거앎은 일부가 아니라 콘텐츠 전체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렇게 콘텐츠 전체를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비유라면 그 소재를 정말 잘 골라야 한다.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면서 의외의 조합이어야 한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완전히 숙지해야 가능한 재해석 방식이다.
6개의 유튜브로 살펴본
1. 원 콘텐츠의 힘을 받는다.
원 콘텐츠가 힘을 발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인기가 많거나 : 데이비드 마, 이매지너리 앰비션, 표절제로
시의성 있거나 : 그거앎, 장삐쭈 코인보감/급식생, 표절제로 곽철용의 숲
포맷화/컨셉화가 잘 되어 바로 인지가 가능하거나 : 케미tv, 장삐쭈
원 콘텐츠는 무엇보다 클릭 유도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다. 제목과 썸네일로 트래픽을 일으키는 유튜브의 특성상 원 콘텐츠가 제목의 키워드나 썸네일의 이미지로 노출되는 것이 좋다.
2. 재해석하는 관점에 전문성이 있다.
장삐쭈는 더빙, 데이비드 마는 푸드 영상 제작 노하우 등 각자의 장기를 기반으로 재해석했다. 그랬기에 제대로 퀄리티를 내고, 더 나아가 또 다른 오리지널이 될 수 있었다. 장삐쭈와 데이비드 마 이후 더빙 콘텐츠, 영화감독x레시피 콘텐츠의 카피캣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들의 아성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다. 재해석하기 편한 콘텐츠를 찾아 나서기 이전에 자신있는 (소소한) 장기를 잘 살려줄 콘텐츠를 찾는 것이 더 유효한 접근일지 모른다. 장삐쭈와 데이비드 마가 그랬듯.
3. 가장 의외의 조합이 있다.
영화감독과 레시피, 실용적이지 않은 하우투, 애니메이션과 어른, 파스타와 아프리카 돼지 열병 등. 재해석에서 낯선 익숙함을 느끼게 하려면 ‘고리와 괴리의 역학’을 잘 저울질해야 한다. 연결고리가 끊어질듯 말듯 원 콘텐츠에서 가장 멀리까지 당긴 재해석이어야 하는 것이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새로움이 주는 흥분감의 합이 가장 최상이 되는 지점을 찾아서. 기똥찬 재해석 거리를 찾았대도 좀 더 멀리 갈 수 없을지 고리를 더 당겨볼 일이다.
* 질문하는 어른의 유튜브 살롱, 유튜브코드에서의 대화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 ‘기획자의 유튜브 - 재해석으로 풀어내는 기획’ 유튜브 재생목록을 공유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영상 외 더 많은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