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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1.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2부 -1-

비극은 그렇게 사소하고 단순하게 시작된다.

11

 김수필은 초조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지난번과 같았다. 다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일은 밀고가 아니다. 변절도 아니었다.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했다.  김수필은 정엽의 어머니인 최연경과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다녔다. 보육원 출신으로 어렵게 공부해 늦은 나이에 온 대학은 그에게 전혀 새로운 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김수필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이미 빠져 있었다. 김수필은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김수필은 그녀를 관심에 두고 있었고 여러 번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었지만 쉽지 않았다. 최연경은 그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었다. 그녀는 의지가 강했고 무엇보다도 사상의 다양성과 자유로움을 추구했기에 권력의 강압적인 속성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김수필은 그런 추상적 대의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가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단과대 학생회장에 나간 것도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권력을 갖고 싶은 본질적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가 김수필에게 보인 호의는 선배 그 이상의 감정은 아니었다. 비극은 그렇게 사소하고 단순하게 시작된다. 김수필은 학생운동이나 조직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발을 들여놓자 관성에 이끌리듯 저절로 앞으로 나아갔다. 회장에 당선된 이후부터 그는 열렬하게  학생들을 선도하고 이끌었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스스로의 변화에 본인도 놀랐다. 그의 노력으로 학생회의 강경노선은 더욱 강화되었고 급진파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대대적인 독재 반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 지금까지 이렇게 강경한 노선을 추구한 학생회 세력은 없었다단과대학의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철과 같은 사내로 불렸다. 그가 주도한 시위로 서울 전역에서 수 천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몰렸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패착이었다. 대중을 이끌어 낼 선명한 구호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추구한 시위의 방향과 설계는 서툴렀다. 그로 인해 경찰은 많은 정보를 이미 확보하고 대대적인 검거와 진압작전을 벼르고 있었다. 그날 1999년 신촌의 집회는 그의 인생의 방향을 여러모로 뒤바꾸어 놓았다.


 수필은 진압대의 곤봉에 맞아 정신을 잃고 구치소로 끌려왔다. 집회는 평화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경찰의 진압으로 시위의 대열은 흐트러지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진압부대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졌다. 플래카드를 든 학생들과 시민들은 신촌 로터리에서 마포로 행진하려고 하고 있었고 이들 간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앞에서 확성기로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이끌던 김수필은 곤봉으로 머리를 맞아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사이 최루탄이 건물 옥상에서 시위대를 통해 수 십발이 발사되었고 시야는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려졌다. 호루라기 소리와 확성기 거대한 마이크 소리가 뒤엉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쓰러진 사람들을 부축했고 선두에 선 몇명이 김수필을 데러가려 했지만 진압경찰에 의해 김수필을 놓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경찰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호송차에 옮겨 실었다. 수필은 그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남대문 경찰서 조사실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때의 상황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형사 몇 명이 들어오더니 이들은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계단의 폭은 높았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습기를 머금은 눅눅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김수필이 도착한 곳은 남영동에 있는 대공 분실이었다.


야. 이 새끼 어거 대물이 하나 걸렀어. 너 잡으려고 우리가 얼마나 공들였는지 알아? 네놈이 학생회장인가 뭔가 되고 얼마나 선동질을 해 댔는지 우리가 쉴 틈이 없어.

우리가 철야와 잠복하고 한 거 생각하면 아휴.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고. 그래도 너 조져서 한건 만들어야 할 거란 말야. 김수필이 천장을 보고 있는 순간 이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렸다.

준비 다 됐어. 몸집이 좋아 보이는 다른 이가 옆 사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김수필은 긴장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조적 욕조가 보이고 천장에 낮은 조도의 백열전구가 빛을 떨구고 있었다. 김수필은 체념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방에서 들리는지 흐릿한 비명소리가 났다.

어디 시작해 볼까? 야 저 새끼 옷부터 벗겨. 중년의 배가 나온 곱슬머리의 한 사내가 말을 꺼냈다. 그는 책상에 발을 올리고 겉옷을 벗고 있었다. 흐릿한 낮은 조도의 백열등 불빛에 그의 인상은 어슴푸레 윤곽만 보였다.

욕조에 물 좀 채워봐.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내뱉듯 말을 했다. 김수필은 런닝 셔츠를 입은 그의 몸통을 슬쩍 보았다. 셔츠는 거대한 지방질의 배를 감싸고 있었다. 흡사 글러브를 낀 것과 같은 투툼한 손에 누런 담뱃 자국과 깨진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 조사실은 시간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낮인지 밤인지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저편에서 또 다른 두 세 사람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였다.

사회 혼란세력은 총통의 말처럼 뿌리부터 뽑아내야지.


 수필이 고개를 힘겹게 돌리자 벽에는 거대한 총통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밧줄과 쇠파이프 몽둥이 그리고 집게와 공구 등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전화벨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지시사항이 내려왔는지 그들은 짧은 대답만을 반복했다. 잠시 후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한 명이 그의 앞에 앉았다. 여전히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정말. 이 새끼 이거 운도 더럽게 좋네. 야 위에서 너한테 제안할 것이 있단다. 여기서 다치고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네가 선택해봐. 네가 순순히 협조하면 우리는 너한테 여러 가지를 줄 수 있어. 너의 선택에 달린 거야.

그들은 김수필에게 서류를 한 장 던져 주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내용을 읽어보고 아무런 고민 없이 사인과 지문을 찍었다. 김수필의 행동에 이들도 놀랄 정도였다. 그는 몇 년간 했던 학생회 활동과 그가 주도했던 집회 그리고 참여했던 친구들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것도 특별한 신념과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김수필은 최연경의 관심을 끌고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다.


웅성거림과 욕설을 내뱉는 경찰을 뒤로하고 그렇게 김수필은 조사실에서 나왔다. 며칠 뒤 모두가 걱정했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학생회에 참여했다. 조사를 받고 온 일부 학생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얼굴과 몸에 상처가 난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학생회 활동을 하며 종종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건 내 주었다. 졸업 때가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추구했던 대의는 오래돼 방치된 플래카드처럼 낡아 빛이 바랬다. 방치된 플래카드가 바람에 따라 방향을 잃고 펄럭이듯 그들도 목표의식과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일부는 정치권을 기웃거렸고 보수정치인이 됐다. 보수라는 말은 정권의 안정이라는 말로 통용됐다몇몇은 현실의 문을 두드리며 타협의 길을 걸었다. 김수필은 정권을 위한 공을 인정받아 졸업한 뒤 경찰로 특채되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일이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경찰이 되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동료와 학과친구들에게도 퍼졌다. 그 이후 이들과 연락이 끊기게 된 것이다. 몇 년 후 그는 적성에 맞지 않아 미련 없이 경찰을 그만두었다. 쥐꼬리 같은 월급도 이유였다. 이후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다 적성과 진로와는 아무 관련성 없는 제약회사에 입사했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 한 뒤부터는 사실 어디라도 상관은 없었다. 시위와 폭력 집회와 관련해 자신에게 남은 찜찜한 무엇인가를 덜어 내고 싶기도 했다. 입사 면접에서 그는 한 인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잘 얘기를 해 놓았다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들은 김수필이 자신들이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양심과 죄책감 그리고 채무감이 자신을 웃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은 흐릿해져갔다. 아니 아예 수필은 처음부터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제약 영업은 쉬웠고 리베이트를 받는 법, 의사를 설득해 자사의 약품을 쓰도록 하고 룸에서 접대를 하면 그만이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후 몇 년간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했다. 몇 년 후 사회는 급속하게 우경화 되었다. 사람들은 어느덧 총통의 독재에 익숙해졌다. 순응과 체념. 우리보다 나의 이익을 우선했다.  배려는 없고 혐오와 차별의 정서가 넘실댔다.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아파트의 가격과 물질이었다. 그렇게 15여년이 흘러갔다. 그는 권력과 자본을 위해 영혼까지 팔아버린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정해준대로 세상을 이해하면 편하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체득했다. 김수필이 한수민과 김판수를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한수민이 죽고 개성으로 가기 전까지 그는 아무 생각이 없이 일상의 파도에 몸을 싣고 나아갔다. 돌이켜보니 안보실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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