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화려한 여운에 말을 잊다
‘류한주, 이렇게 사람을 약 올렸다 얼렀다 하는 것이 특기지. 얄밉다 정말.’
하고 치에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한주는 길을 가다가도 돌아볼 만큼 멋진 남자다. 게다가 세상 술에 대한 어마어마한 경험과 박학함, 그리고 더 좋은 술에 대한 열정 등을 생각하면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은 남자 류한주가 아니라 한국의 전주에서 날아온 ‘오늘’의 매력에 힘을 쓸 수가 없다는 기분이다.
누구의 매력이든 어쨌든, 잔을 부딪치고는 다시 ‘오늘’ 한 모금을 머금었다.
일본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산미가 있으면서도 사실은 단맛이 강하기로는 어지간한 디저트 와인 이상이다. 하지만 그 균형이 좋아서 달다는 느낌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감칠맛은 무게와 깊이로 입체적인 맛과 향의 구조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펙트럼이 넓으면서 긴 피니시. 이건 정말 최고급 와인 못지않게 넓고 길고, 심지어 깊이까지 느껴진다.
니혼슈 중에 이런 피니시를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술은 치에가 아는 한은 없다. 요즘 나오는 나마자케는 확실히 피니시가 다채롭고 긴 것을 추구하는 편이라는 점에서, 한주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피니시의 황홀함에 길게 붙들려 있으면서 은은히 분한 마음도 치밀어 올랐다. 거부할 수 없게, 무릎이라도 꿇린 느낌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술, 일본으로 들여오고 싶다. 아니 일본 밖에라도 어디든 나서서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애초에 일을 시작한 것도 좋은 술에 대한 애정에서였다. 이런 술이라면 정말 자부심에 가득 차서 열심히 소개하고 다닐 것 같았다.
그런 달콤한 기분을 냉정하게 또 깨버리는 저음이 울렸다.
“사람들은 치에가 만들어주는 편안한 소비환경을 진실이라고 믿겠지만… 난 굳이 싸구려 인공진실 같은 거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건 인생의 목표가 아닌 사람이야. 내 스스로 그런 것에 위안을 받을 줄도 모르고.
엿튼 난 내일 아침엔 도쿄에 가야 하니까 먼저 씻고 잘께. 치에는 혼자 더 마시던지 알아서 해. 중요한 건 진실은 값싼 게 아니라는 거야. 값싸고 편하게 진실을 가공해서 판다고 그걸 착각하진 말라고.
그럼 오야스미~”
이렇게 말하며 한주는 유독 ‘오늘’의 병만 따로 챙겼다. 그리곤 치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훽 바람이 일 정도로 일어나서 스위트룸 안쪽의 마스터베드룸으로 갔다. 졸지에 혼자 남겨진 모양이 된 치에는 부아가 더 치민다.
‘가려면 그냥 가던가, 왜 하고많은 술들 중에 하필 그걸 집어가냐구. 류한주, 내가 언젠가 한 번은 그 콧대를 눌러주겠어.’
조용히, 하지만 꾹꾹 눌러담듯이 읊조리고는 치에도 잘 준비를 시작한다.
니가타 오쿠라 호텔 스위트룸. 불이 꺼진 시간은 열두 시가 채 되지 않았다.
<용어설명>
피니시: 술을 마시고 난 다음의 여운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와인에서는 이 피니시가 길고 폭넓은 것을 중요한 미덕으로 친다. ‘술은 향이다’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피니시는 좋은 술로 평가받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