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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일류 감정가 파올로, 강릉으로 합류

강릉 하고도 주문진의 집은 가족도 없는 내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목적으로 만든 곳이기도 하다.

 

새로 지은 2층집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언덕은 가파르지도, 큰길에서 아주 멀지도 않은 곳이다. 멀리서도 잘 보이는 곳이라 찾기는 쉽다.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오면 아무도 없을 때 빼고는 걸어잠그지 않는 대문이 있고,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을 지나 현관을 들어서면 1층은 주방과 큰 홀이다. 사람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큰 잔치를 벌일 일도 있을 것이라서 일부러 이렇게 구조를 만들었다. 날이 좋으면 폴딩도어로 된 유리벽을 열고 정원과 터서 가든 파티를 할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실제로 홀이 그득하게 사람을 불러본 적도, 가든 파티를 해본 적도 없긴 하네. 


1층 안쪽의 주방도 사람들이 즐겁게 볼 수 있게 오픈공간이다. 음식을 하는 떠들석한 분위기, 플람베(Flambé) 같은 기술이나 도마와 식기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들이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각종 주방기기는 예술가들의 솜씨로 리폼이 되어서 오는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보이는 정원 다음으로 인기가 좋은 사진 스폿이다. 물론 관광객들이 몰리는 게 싫어서 사진의 공개는 하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지만. 

애초에 오는 사람들은 다 개인적으로 초대하는 사람들이고, 가끔 관광객들이 예쁜 집이라고 와서 기웃거릴 때에는 여기는 개인 주택이라고 타일러 보내면 그만이라 보안유지는 잘 되는 편이다.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도 이 집에 소장되어있는 예술품들의 가치 때문에 보안업체와는 특별한 계약을 맺고 있다. 주로 고서나 골동품 위주인 내 취향이라 작가 이름으로 누구 하면 알아줄만한 그런 이름값은 없어도 이 집에 있는 여러 물건의 가치가 강릉시립미술관 전체보다는 높을 것이다. 어쨌든 소문 안 나는 것이 최고의 보안이자 사생활 보호니까,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있다.


2층은 개인 생활공간이다. 내 침실은 호텔의 스위트룸 같이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면 두 개의 방이 더 있는 구조다. 방에 들어서면 우선 응접실이 있다. 아래층 홀이 너무 휑해서 사람 수가 적을 때에는 어색하기 때문에 서너 명 정도의 손님이 올 때는 이곳에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하는 것이다. 


이 응접실이 일종의 안티체임버(Antechamber, 메인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방) 역할을 하고 그 안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넓은 창을 낸 침실이 있다. 침실 안쪽에 욕실이 있는 앙 스위트(en suite) 구조다.


침실 과 반대방향으로는 바다를 등진 방향으로 서재가 있다. 서재(書齋), 말 그대로 ‘책방’이다. 영어로 서재를 오피스(office)나 스터디(study)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옛날 귀족들의 규모가 있는 저택에서는 서재를 라이브러리(library)라고 했다. 책이란 것이 귀해서 서가 가득 책을 비치해 둔다는 것 자체가 부의 상징이기도 한 시절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양있는 사람들의 집에는 책을 위한, 책이 주인공이 되는 방이 따로 있었다. 사람은 거기서 그 책들을 읽고 글을 쓰고 하는 것뿐, 방의 주인은 책인 그런 공간. 


나도 책 욕심이 많은 편이라 책은 어지간히 사모았고, 몇 번이나 국제적으로 이사를 하는 동안도 살뜰하게 챙겨서 여기로 모셔왔다. 개인주택의 서재로는 결코 작지 않은 공간이지만 책이 워낙 많다보니 이중 서가를 사용하고, 일부 희귀본을 위해서는 보관용 책장이 따로 있는 것은 물론이다. 


채광이 좋고 밝은 분위기의 집이지만 이곳만은 동해바다를 등져서 햇빛이 되도록 적게 들도록 한 것은 직사광선은 무조건 종이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구도 마호가니를 주로 써서 색조로나 무게로나 장중함이 느껴지도록 설계했다. 오늘은 바로 이곳에서 베르사이유의 붉은 장미, 혹은 ‘뻬뺑의 여행(tour de pepin)’님을 맞이할 것이다. 


특별한 소품과 함께 말이다. 


서재에 들어오면 바로 시선이 머무는 곳에 뻬뺑의 노트를 핀조명과 함께 전시해 두었다. 마치 인디애나 존스가 드디어 보물을 찾았을 때 같이,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한 가운데 눈에 잘 띄는 곳에 말이다. 인디애나 존스 영화같이 함정이 있지는 않지만 이것으로 나도 조금은 그녀를 놀라게 해줄 수 있길 기대하며.




참, 이쯤에서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가야겠다. 바로 나의 친구이자 이 집의 살림을 도맡는 파올로다. 

이름은 어디 남유럽에서 온 사람 같겠지만 사실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사람이다. 파올로라는 이름은 말하자면 가명이긴 한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 이름을 오래 쓰다보니 그 이름이 더 본명 같고 편하다고 한다. 나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파올로라고 불러서 그 편이 편하다. 


파올로는 내게는 어떤 면에서 큰형 같은 존재다. 처음 유럽에 가서 일을 시작할 무렵 알게 되어서 친해졌다. 

같은 한국사람이다보니...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언제 봤다고 형님동생부터 시작하는 문화는 혐오한다. 한국사람이라고 무조건 반갑거나 잘 해주지도 않는다. 사기도 아는 사람끼리 치는 게 확률이 높다고, 동포랍시고 접근해서 등을 치려는 인간들은 숱하게 겪었다. 


애초에 현지 사회에 적응을 못 하는 사람들이 한국사람 찾고, 그래서 사기를 당하는 거지. 파올로도 나도 현지 사회에 완벽히 녹아들어간 사람들이기도 하고, 한국인은 단일민족 같은 가당찮은 소리는 믿지도 않고, 단일민족이 자랑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한국사람이라는 것만으로는 인간관계에서 전혀 플러스가 안 되는 사람들이다. 


파올로와는 처음엔 거래로 얽힌 사이였다. 파올로는 당시 나같이 책과 박물관으로만 공부한 얼치기 초짜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라 진짜로 유럽의 유수한 박물관에서 유물 복원전문가로 일하다가 이 일에 뛰어든 베테랑이었다. 진품 감정뿐 아니라 최적의 보관과 패키지를 원한다면 파올로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전문가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만큼 실력이 좋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진정한 프로라서. 


파올로는 철저히 감정과 수선 및 포장만을 담당하면서 나와는 달리 일을 가리지도 않는 눈치였다. 감정이 잘못될 경우에는 엄청난 책임을 져야하기도 하고 감정이 제대로 되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진상고객이란 것은 어디나 있는 법이어서 여기도 경우에 따라서는 꽤나 고약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일은 다 맡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파올로와 친하게 된 것은 어느 러시아 고객의 일을 처리하다가 된통 걸린 직후였다. 

고객이 그럴 리가 없는 물건을 위조라고 트집을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클레임 접수 직후에 서너 번이나 단계별로 확인을 해보았지만 물건은 틀림이 없었다. 아무리 근거를 잘 정리해서 보내줘도 먹히지 않았다. 위조라는 근거도 반박하기조차 빈약한, 그냥 본인 감에 가짜라는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고객은 러시아 정계의 고위층 인사였는데 이런 사람들은 본인들 자체가 마피아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사람인 경우도 있다. 수틀리면 사람 목숨 한둘은 쉽게 여긴다. 이 때 파올로가 자기 이름을 걸고 물건을 재감정해서 보증을 해준 덕에 간신히 억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당시 파올로는 밀라노에 근거를 두고 있었고, 나도 이 정도 인사말은 이탈리아어로 할 수 있었다. 일상 비즈니스는 영어로 대화했고 말이다.


‘당신은 좋은 눈을 가졌군. 정직한 사람의 눈. 이 바닥이 정직하면 버티기 힘든 곳이라고 하지만, 난 왠지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좀 보고싶기도 해.’


갑자기 한국말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것이 그와 내가 처음으로 한국어로 나눈 대화이기도 하다. 의식하지 않아도 역시 마음속 깊은 말은 모국어로 하게 되는 것일까?


그로부터는 나도 일처리 할 때 꼭 파올로를 찾았다. 그의 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객이나 다른 전문가 섭외에 대한 조언에 있어서도 파올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본인은 별로 가리지도 않지만 나에게는 ‘선구안’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얘기했다. 


“일이라는 건 돈을 보고 하는 게 아니야. 앞으로는 돈이 들어오고 뒤로는 목숨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자기가 스스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일들을 찾아야지.”

“하지만 편안한 일이란 게 있기나 한가요? 그리고 제가 그런 것 가릴 처지도 아니잖아요. 누가 뭐라도 일을 맡기면 감지덕지인데.”


파올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말도 맞네. 원래 베테랑이란 건 전장에서 살아남은 고참병들을 일컫는 말이지. 베테랑이 되려면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겨야 하니까, 어디 잘 살아남아 봐. 언젠가는 일거리도 많이 들어오고 싫어도 가려서 해야할 때가 올 거야.”


정말 그랬다. 몇 년 죽자고 고생을 하고, 헛욕심을 안 부리다 보니 ‘실력’이라는 게 붙었다. 

당시로는 역사학이나 고고학쪽은 ‘데이터’를 이용한 방법론이란 전무하던 시절인데, 나는 특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열심히 논문이며 저널들을 판 덕에 데이터 인문학을 하는 소장학자들과 일찌감치 연결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데이터를 사용한 방식이 파올로 같은 올드스쿨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감정률이 좋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도 하고, 고객에게 데이터를 기반으로 확률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불신이 만연한 이 업계에서 대단한 강점이 되었다. 어지간한 신뢰관계가 아니고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초짜들이나 저지르는 실수라고 생각하는 바닥이다. 골동품 감정가를 매수하거나 하는 것은 기원전 이래로 '관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게 되자 일거리는 밀려들었다. 어차피 혼자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그제야 파올로의 말이 실감이 났다. 최고가의 일이 내 일이 아니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을 최고가에 수행하는 것이 최선임을 깨달았다. 내가 잘 하는 분야에서는 그럴만한 실력이 있는지라 이제 그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잘 하지도 못하는 분야에 욕심을 내면 문제가 되는 것이고. 


파올로가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은 데이터라든가 그런 대세의 흐름과는 좀 다른, 어쩌면 단순한 이유였다.


“이제 눈이 옛날 같지 않아. 정말 작은 차이는 분별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그만둘 때인 거지.”


자기 몸 상태에 대한 정직한 평가였고 결정이었다. 파올로도 마침 내가 은퇴하기로 한 시기와 비슷한 때에 그런 결론을 얻었다. 파올로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철저히 기술자 입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큰 돈을 만지지는 못했다. 물론 여생을 먹고 사는 데 지장이야 없겠지만. 


파올로와 같이 강릉에 정착하기로 한 것은 서로 가족도 없이 외로운 몸이라는 것 외에도 배짱이 맞고 공부하기와 여행다니기를 좋아한다는 면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사람 낯을 가리는 나와는 달리 파올로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리더십이 있었다. 그래서 파올로가 같이 있으면 집안의 고용인들도 통솔하고 손님 접대도 매끄럽다. 내겐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이런 파올로가 프랑스어로 마드무아젤을 환영하는 것도 내가 꾸민 서프라이즈의 작은 한 부분이다. 파올로는 이탈리아어는 유창해도 프랑스어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오월의 붉은 장미꽃 아가씨가 눈이 둥그레질 정도의 프랑스어 인사말 몇마디는 문제가 없다. 


이거 어쩐지 장난을 치고싶은 기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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