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과 껍질

내용물과 껍질의 관계, 해탈과 욕망

여러분은 코코넛 껍질을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껍질을 가져가죠? 아직 껍질을 버릴 때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껍질은 코코넛을 싸는 데 도움이 됩니다. 코코넛을 먹은 뒤에 껍질을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명상도 이와 같습니다. 욕망이 없었다면 명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욕망으로 명상하는 것이 갈애입니다.
- 아잔차 -

이 구절에서 아잔차 스님은 코코넛 껍질을 명상을 하고자 하는 욕망에 비유하셨습니다. 명상을 하는 이유는 해탈을 하기 위한 것이지만, 앉아서 눈을 감는다고 바로 평화로운 해탈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탈에 대한 갈애 없이 명상을 지속하기란 불가능하죠.

정좌하고 눈을 감으면 갖가지 감각과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욕심에서 옵니다. 욕심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우리를 어떤 방향이나 모습으로 규정하고 분류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저 바라보지 못하고 쉼 없이 분류합니다. 그게 생각의 일이죠.

생각의 규정이라는 행위는, 마치 항아리를 개구리라고 부르지 않고 항아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항아리를 원하면서 개구리를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혼란스러워지죠. 항아리를 항아리라고 규정하는 것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항아리는 그 물체의 이름일 뿐, 그 물성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대상을 이름으로 부르고 서로 소통하죠. 이는 마치 영어를 처음 배운 사람 둘이서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국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대화를 그들은 막힘없이 이해하고 소통하죠.

이러한 기괴한 형식의 대화가 가능한 이유는, 그들의 영어에 대한 이해와 한정이 비슷한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A가 B나 C가 아닌 A이기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소통에 문제가 없습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약속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욕망은 이와 비슷합니다. 누군가 나를 "멍청이"라고 한다면, 나는 화가 날 것입니다. 내가 규정하는 나는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누가 나를 멍청이라고 부르더라도 혼란스럽거나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의 규정 자체가 무의미함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죠. 마치 바람이 그물을 저항 없이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규정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명상을 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명상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산은 산일뿐이고 물은 물일뿐입니다. 누구에게 규정지어지지 않더라도 그들은 그 모습이고, 거기에 혼란이나 욕망은 걸려들 틈도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고착화된 규정지어짐을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명상은 어렵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욕망이 필요합니다. 마치 악행에 대한 분노가 선한 마음을 강력하게 만들어서 악을 처단하는 것처럼, 우리는 해탈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슴에 품어야만 역경을 넘어 해탈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하루에 몇 분 명상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욕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명상의 결과물을 얻으려는 찰나에, 우리는 그 껍질마저 까서 버려야 합니다. 엄마 뱃속의 태아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 양막을 찢는 것과 같습니다. 찢지 않으면 나오지 못합니다. ​


마치 신을 신고 집에 와서, 신을 벗고 편안하게 있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시장에서 망고를 사 오면, 껍질은 내용물을 보호해 주고 옮기는 것에 도움을 주지만, 망고를 먹기 위해서는 그 껍질을 까야 하고, 까는 순간 껍질의 쓰임은 없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