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가능 May 20. 2024

자연스럽게 시선 처리하고 지나가기

여름이 되면 나 빼고 다 벗고 다니는 것 같다. 덴마크 누디즘에 대하여

 

북유럽 텐션이 수직상승하는 기점


끝날 것 같지 않던 암흑의 겨울이 끝나고 해는 길어졌지만 비는 겨울만큼 내리던 축축하고 쌀쌀한 봄이 지나니 코펜하겐에도 드디어 여름이 찾아왔다. 다른 계절은 다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극혐인데 북유럽의 여름은 따스하고 뽀송뽀송한 지상낙원이다. 너무 덥지도 그렇다고 너무 춥지도 않다. 해도 밤늦게 까지 떠있으니 하루종일 야외활동 하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날씨다. 실내에 있어도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필요할 정도로 덥지 않으면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있어도 춥지 않다.


'skål!(건배)'


내가 맥주캔을 따자마자 근처에 있던 덴마크인이 맥주병을 들면서 나를 향해 건배를 외쳤다. 다른 서양국가에선 (특히 미국) 저런 스몰토크가 일상적이겠지만 북유럽 사람들은 내성적이고 타인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이유가 없으면 말을 걸지 않는다. 길 가다 미소 인사도 잘 안 함. 여름이 한정적으로 말아주는 덴마크인들의 외향적 인싸 바이브에 나도 순간 기분이 들떴다. 덕분에 집에 걸어가는 길에 맥주 한 캔을 신나게 비웠다. 


북유럽 여름은 또한 사람들의 옷꺼풀을 벗긴다. 좀 많이 


한여름에는 11시까지, 한겨울에는 4시도 안 돼서 해가지는 중간이 없는 북유럽 일조량 패턴을 한번이라도 겪어 보면 1년 내내 비교적 일조량이 고른 한국의 사계절이 무척 그리워진다. 한국의 겨울은 덴마크보다 훨씬 춥지만 맑은날에는 햇빛에 눈이 녹는다. 해가 아예 없는 겨울을 맞이하게 되면 그 한줄기의 햇빛이 간절해진다. 북유럽의 사계절은 여름동안 너무 많은 해를 탕진하다 보니 나머지 계절에 갖다 쓸 해가 없어 하루종일 흐려 노을조차 볼 수 없는 우중충한 겨울이라는 슬픈 결말로 끝난다. 해피 앤딩이 아닌걸 이제 아는 나는 여름이 시작하자마자 몇 달 후에 다시 돌아올 겨울이 벌써 두려워진다. 날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해 놓고 고작 몇 달 후에 인사도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것 같은 나쁜 애인과 불안한 연애를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만큼 이 귀하고 짧은 여름동안 해야만 하고 그때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일단 좀 벗자. 


 일단 물이 있는 곳에 나체로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Topless로 태닝 하다가 물 안에서는 다 벗고 수영하는 여자들도 꽤 있다. 수영하고 위로 올라오면서 주섬 주섬 입는다. 딱히 가림막이나 간이 탈의실 같은 건 없다. 누드 비치냐고? 덴마크는 따로 누드비치를 지정하지 않는다. 물이 있는 모든 곳에는 합법적인 살색으로 가득해진다. 물론 암묵적인 합의로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말이다. 


동네 근처를 산책해도 뒷마당이나 공원에서 엎드려 태닝 하는 사람들 천지다. 외출하기 전에 창문 밖으로 벗은 채로 누워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면 그날 날씨는 따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 이런 갓벽한 날에는 모든 집 앞마당이 태닝샵이 된다.



 "저는 유두색이 태닝 된 색일 때 좀 더 예뻐 보인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유두 태닝의 필요성을 느껴보지 못한 나는 해당 기사 내용이 한동안 계속 기억에 남았다. 뭔가 깨달은 느낌이었다. 맞네.. 유두도 해를 보면 탈 수 있겠네. 태어나서 거의 해를 본 적 없고 태닝 될 권리조차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내 유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는 이미 사춘기 지나고부터 쭉 웰던색이라 괜찮아요. 나의 유두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네가 더 진해지는 게 싫거든.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유두뿐만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 저온으로 장시간 수비드 태닝공법으로 익혀진 피부들이 눈에 띈다. 


어딜가나 다 살색이야. 그냥 자연스럽게 걸어가자 


정말 더운 여름에는 동네 광장에 있는 분수대 근처에도 다 벗고 물놀이하는 애기들이 많다. (정말 다행인 건 분수대에서 성인이 다 벗고 물놀이하는 건 여기도 불법이다.) 애들인 건 알겠는데 동네 분수대에서까지? 한국에서는 도무지 보기 힘든 그림인지라 본능적으로 흠칫 하지만 바로 고개를 앞으로 유지하고 자연스럽게 갈길 간다. 적어도 애기들은 다 벗고 돌아다니면 명화에 그려져 있는 아기천사들 같다.


모처럼 호숫가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내 시야에서 대충 비치타월을 두르고 환복을 하다 털투성이의 덜렁거리는 걸 보여준 아저씨를 봐도 이제 그려려니 한다. 탈의실도 따로 없는데 잠시 성기가 까꿍 했다고 풍기문란죄에 해당되지도 않고 아무도 불쾌해하지 않는다. 나도 이제 여기서 자연스럽다고 정의 내린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랑스러운 동방의 외국인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작년 어느 여름날 나의 시선처리는 별로 자연스럽지 못했다. 


덴마크에서 제일 크게 열리는 페스티벌로 지역으로 유명한 Roskilde라는 도시에 갔을 때였다. 캠핑장에 텐트를 설치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브라만 입고 더위에 지쳐 짜증이 섞인 얼굴로 유모차를 끄는 여자가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꽤나 가까워졌을 때 유모차에 앉아 있는 다리를 쫙 벌리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인 여자애가 보였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고 보시면 된다. 


어렸을 때 할머니랑 사촌동생 돌 사진을 같이 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여자애를 남자애처럼 다 벗고 찍어 놔서 남사시럽다.' 하시면서 바로 앨범 다음장으로 넘기셨다. 남자애들은 갓난아기 때는 전라노출(?)이 어느 정도 용인되지만 여자애는 태어나자마자 남들이 보지 못하게 가릴 곳은 가려야 한다고 배우면서 자라서일까. 저 그림은 나에겐 꽤 충격이었다. 


주변 친구들 생각도 궁금해서 물어보니 '애잖아 뭐 어때.'라는 반응. 한국에서 저렇게 브래지어만 입고 다 벗긴 여자애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걸어 다니면 아마 누군가는 미친 사람으로 착각해서 신고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역으로 놀라는 반응이었다. 


내 남동생은 사실 8살까지 여탕을 다녔다. (심지어 여성 전용사우나였다. 이름은 여인천하) 어느 날은 탕에서 동생은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서로 아는 척 인사하더니 바로 둘이 냉탕에 들어가서 어찌나 신나게 물놀이를 해댔는지 찬물이 계속 때를 밀고 있는 나한테 튀었었다. 태권도를 한참 배우던 동생은 계속 그 친구에게 자랑한다며 다리를 찢었고 그럴 때마다 '야 너 꼬추 다 보이거든~?' 이랬는데 그것도 그냥 보이니까 순수하게 보인다고 한 거겠지. 그때 당시엔 신기할 정도로 여탕에서 꼬추 자랑질을 하던 8살인 내 남동생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각자 탕에 온 본인만의 목적을 열심히 수행 중에 바빴다. 


2004년 여인천하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진 덴마크 바이브였다고나 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