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덕영 Feb 04. 2017

'책도둑'의 시선으로

영화 <책도둑> (The Book Thief) 리뷰

 '김PD의 인문학 여행' (38)


영화 <책도둑>에서는 상징적인 책들이 몇 권 등장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책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2005년 원작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무려 230주 동안 이름을 올렸다. 그런 소설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2013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9,000만 달러라는 흥행 수익을 올렸다. 원작 소설이 지니는 탄탄한 구성, 제2차 세계대전을 독일 내부의 시점에서 바라봤다는 점이 크게 어필했다. 



2014년에 국내에서도 개봉되었지만 흥행 성적은 저조했다. 그래도 작품성을 인정한 몇몇 블로거와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리뷰가 올라오고 있는 상태다. 시대와 역사, 한 개인의 삶 속에서 한 권의 책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부지러한 시도들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숟가락 하나 더 얹으려고 이 글을 쓴다. 가급적이면 기존에 나와 있는 리뷰들과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작품을 좀 색다른 각도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영화에 등장하고 있는 몇 권의 책에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책이 등장하는 순서가 마치 연극 무대로 치면 각각의 독립된 막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각각의 독립된 막 속에서 주인공들이 갈등하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때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기분으로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든다. 책이 등장하고 책의 암시가 스토리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책은 공교롭게도 <무덤 파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라는 책이다. 실제로 이런 책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다만 오래전부터 유럽에서는 장례식의 마지막 절차로서 무덤을 파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형식의 규준을 요구했던 것 같다. 죽은 사람의 육신이 다시 부활하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볼 때는 죽은 자의 육체도 소홀히 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땅을 팔 때도 중앙을 중심으로 파기 시작해서 특정한 규격을 맞춰서 관이 안정적으로 땅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표준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허구적인 가상의 책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무덤 파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라는 제목부터가 독특하고 신선하다. 


그리고 그 책은 눈으로 뒤덮인 설원을 달리는 기차에서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당한 어린 동생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 원인도 모르는 갑작스러운 죽음 위로 덮이는 담담한 나래이션, 뜻밖에도 그걸 증언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다. 물론 관객들은 이것을 눈치챌 수 없도록 교묘하게 짜여 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 다정다감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다. 관객들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죽음' 그 자체를 인식하는 순간은 영화가 끝날 때쯤이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봤지만, '죽음'의 나래이션으로 스토리가 등장하는 경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의 중심에 이렇게 천진난만한 죽음의 나래이터를 설정해놓다니! 


'죽음'이 관찰자이자 화자이다. 그런 '죽음'의 눈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죽음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죽음'이 죽음의 시대를 바라본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덕분에 영화는 희극 같기도 하면서 또 비극 같기도 하고, 단만극 같기도 하면서 웅장한 대하 드라마를 보는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감상이 가능한 것은 화자를 '죽음'으로 등장시킨데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죽음이 죽음을 바라는 본다는 게 얼마나 이질적이고 모순적인가. 그러나 역시 이 작품을 개성 있게 만들어주고 있는 플롯이 바로 죽음의 나래이션이란 걸 부정할 수는 없다. 


문득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가 주장했듯이 미학의 기본은 잘 짜인 플롯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가능태와 현실태를 지니고 있다. 이 말을 미학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면 결국 모든 미학의 가치는 플롯을 어떻게 선택하고 발전시킬 것인가로 귀결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토리의 맹아는 가능성과 현실성이 공존하는 '플롯'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 <책도둑>에서는 '죽음'의 시선이라는 플롯이 여기에 해당된다. 


동생의 갑자스런 죽음으로 목적지로 향하던 기차가 잠시 정차한다. 어딘지도 모를 적막한 설원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다. 죽음이란 늘 그렇게 찾아오는 것. 그리고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차가운 땅을 파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은 동토 위에 어린 동생의 시신을 묻는다. 이 때도 죽음은 화자가 되어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들 사이를 맴돈다. 주인공 소녀의 어린 눈에는 동생의 죽음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차가운 시선으로 동생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걸 목격한다. 그리고 우연일지 필연일지 모르지만, 한 무덤 관리인의 주머니에서 책 한 권이 떨어진다. 동생의 육신이 묻혀 있는 곳 바로 위로 말이다. 이제 곧 열 살이 되는 여주인공 리젤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 글자를 몰라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맹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글을 깨우치고 책을 이해하기 전까지 열 살 소녀의 세계에서 한 권의 책은 동생의 무덤 위에 피어난 호기심의 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심어진 한 줄기 꽃이 자라는 걸 죽음의 나래이터는 끝까지 추적한다. 


두 번째 책은 H.G. 웰즈의 <투명인간>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유태인과 공산주의 박멸을 외치며 불온한 사상을 담은 서적들을 대대적으로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럽판 분서갱유라 일컬어지는 1933년 나치의 '분서 사건'을 가리킨다. 어린 소녀의 눈에 광기에 휩싸인 제복을 입은 나치 선동대들이 불태우는 책들은 호기심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동생의 죽음, 무덤 위에 떨어진 한 권의 책, 책에 대한 호기심, 불길에 휩싸인 책들 사이로 어린 소녀의 시선은 끊임없이 '왜?'를 묻고 있다. 


집회가 끝나자 텅 빈 광장에서 소녀는 불에 그을린 타다 만 책 한 권을 손에 얻는 데 성공한다. 왜 많은 책들 가운데 꼭 그 책이었을까? 원작 <투명인간>에서 우연한 기회에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된 주인공 그리핀은 자신의 불운에 분노하고 결국엔 광기에 사로잡혀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불태운다. 당대의 사람들 눈에는 히틀러의 광기와 반인륜적 행태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는 1938년 독일의 '투명인간'이다. 사람들이 그의 실체를 눈으로 보기까지는 세월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주목할 책은 나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영화답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다. 영화 속에서는 여주인공 리젤을 입양된 독일 부모의 집에 피신한 유대인 청년이 갖고 있던 책이었다. 1차 대전 때 참전했던 양아버지는 유대인의 도움으로 전 대원이 몰살당한 전투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한다. 생명의 은인이었던 유대인에 대한 빚을 갚는 차원에서 유대인 청년을 자신의 집 지하실에 숨겨주기에 이른다. 소녀의 눈에 유대인 청년의 존재는 공산주의자였던 부모가 나치의 박해를 받아 알 수도 없는 유배지로 끌려간 상황과 오버랩된다. 자기 연민이 동정이 되고, 책을 매개로 친구가 된다. 


유대인 청년 입장에서는 자신을 보살펴주는 독일 소녀에 대한 고마움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치의 박해를 피해 지하실에 숨어지는 입장에서 줄 것이 있을 리 없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책을 한 장 한 장 흰 페인트로 칠한다. 그렇게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억압과 야만의 아이콘에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한 권의 노트가 된다. 


"유대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 모든 생명체, 나뭇잎이나 새들은 삶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게 우리와 진흙덩이의 차이야. 바로 이야기가 있다는 것! 이야기는 생명이야, 리젤! 모두 백지야. 네가 채워 넣어." 


그것은 일종의 명령이었다. 책이 불태워지고 인간성이 말살되는 아만과 폭압의 시대 속에서 희망의 이야기를 써넣으라는 강렬한 소망이었다. 유대교에서 기록이란 일종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생명이 기록된 책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가치였다. 유대의 아이들이 책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지혜를 얻는 과정과도 일맥상통한다. 그가 보고 깨우친 인생의 교훈을 죽음 직전에 놓은 한 유대인 청년이 평범한 독일 소녀에게 전달하는 순간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이 책의 역사였고 인류의 문명이 유지되어 온 방식이기도 했다. 게다가 하얗게 페인트로 가려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언젠가 종말을 맞게 될 나치즘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했다. 문학적으로나 영화적으로도 가장 아름답게 승화된 야만에 대한 응징이었다. 


'너희들은 태우지만 우리는 진실로 덮을 것이다.' 


유대인 청년의 예언은 세월이 흘러 그대로 적중한다. 영화 속에서는 결말 부분에 해당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죽음을 준비하는 나이 든 리젤의 모습 속으로 다시 초반부에 등장했던 '죽음의 나래이터'가 등장한다. 그를 통해 작가로 성공한 아흔 살 리젤의 모습이 관객들 앞에 소개된다. 영화 속에서는 리젤이 쓴 책이 어떤 책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기 자신의 경험을 담은 이야기일 거란 걸 추측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유대인 청년이 선물했던 가려진 <나의 투쟁>에 기록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리젤은 그렇게 나치를 극복하고 인간성을 회복했다. 그런 점에서 분명 영화는 권선징악과 해피앤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건 시종일관 담담하게 진행되는 '죽음의 나래이터' 때문이다. 옆집 할아버지 목소리처럼 다정하고 인간의 온기까지 느껴지는 '죽음'의 나래이션 때문에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의 뫼비우스 띠를 손목에 찬 느낌도 든다. 나의 경우는 '죽음'의 나래이션이 문제였다. 아니 문제라기보다는 너무나 강렬한 존재였다.


그래. 어차피 때로는 이성적인 시선으로도 다 이해할 수 없는 게 인간사다. 6백만 명의 유대인을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살한 잔인한 역사, 하지만 학살의 역사가 비단 나치뿐이었을까. 나치가 불의가 된 것은 어쩌면 패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히틀러의 나치가 승리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일이다.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악마의 손을 잡는 사람들 세상에 많다. 갖은 자의 폭력으로 쓰인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쯤 되면 허무주의가 머리통을 휘감는 기분이 든다. 진실로 절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문득문득 살면서 접하는 비논리적, 몰상식적 현실 앞에서 절망하지만. 그래서 마지막 순간 '죽음의 나래이터'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참 이상하다고 말이다. 


"나는 항상 인간의 선과 악을 찾아냅니다. 나는 그들의 추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있죠. 그런 것이 공존한다는 게 참 이상하기만 합니다."


에이! 그래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희망으로 끝내고 싶다. 어쩌면 나 역시 지금 유대인 청년이 했던 것처럼 야만의 책갈피마다 흰 페인트로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닐까, 하루하루 그 위에 희망의 단어를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록하는 건 투쟁하는 것이고, 또 다른 나의 투쟁이다. 


나치에 의해 감행된 대대적인 분서 사건은 1933년 5월 10일 일어났다. 당시 나치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비독일인의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베를린을 비롯한 34개 주요 대학 도시들에서 수많은 책들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서적 화형식을 진행한다. 공식적으로 18,000여 권의 책들이 불태워졌고, 소각된 책들 가운데는 헤밍웨이, 헬렌 켈러, 아인슈타인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1995년 분서 사건이 일어난 베를린 바벨플라츠 광장 한 구석에는 나치의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며 이스라엘의 조각가 미카 울만이 만든 기념물이 하나 만들졌다. 바닥을 파고 투명한 유리로 덮인 땅속에 만들어진 조형물 속에는 당시 불에 탄 책들을 꽂을 수 있을 정도의 빈 책장이 설치되어 야만의 시대를 고발하고 있다고 한다. 


글: 김덕영




자신의 스토리와 콘텐츠로 단골을 만들어라! '왜 우리는 레드오션,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만 살아남으려 하는가?' 인적도 드문 서촌 골목길에서 3년을 살아남은 한 까페 이야기.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오히려 그때부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다간 30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부제: 뒤늦게 발동걸린 사랑이야기. 가슴 절절한 중년들의 사랑이야기. '당신은 지금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와인과 인문학' (밴드) http://band.us/@kimpd


매거진의 이전글 소리 내어 읽은 책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 이유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