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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Feb 16. 2017

외로움에도 나이가 있다

누구나 '혼밥', '혼술'의 시대를 질주해야 하는 운명이 있다

'김PD의 인문학 여행' (39)


   혼자서 밥을 먹는 '혼밥', 혼자서 술을 먹는 먹는다 해서 '혼술', 언어는 시대를 반영해서 변천한다. 그렇게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혼자서 즐길 수 있는 문화도 많아지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음식점에 들어가 혼자서 밥을 먹을라 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건 술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 혼자서 바에 앉아 술 한 잔 할라지면 반응은 둘 중 하나, '남자가 필요한가?' 혹은 그냥 '남자가 필요하겠지' 하고는 아무 생각 없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무례한 남자들의 무모한 대시. 물론 세상이 변했지만, 여성 혼자서 술집이나 바에 들어가 술 한 잔 편하게 할 수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뿌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에게는 혼자서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별로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10여 년 전 일본 나고야에 취재를 갔었다. 당시 취재 목적은 '쌀'이었다. 밥을 주식으로 삼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똑같지만, 밥을 먹는 방식은 사실 많이 다르다.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는 우리와 달리 일본은 젓가락을 사용하고, 국물과 반찬을 나눠 먹는 방식도 서로 다르다. 우리가 쌀을 단지 밥을 지어먹는 데 활용하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쌀을 이용해서 별별 희한한 제품을 다 만든다. 사실 한 톨 쌀에서 가장 영양소가 많이 들어 있는 부분은 바로 쌀눈이다. 비타민과 토코페롤뿐만 아니라 리놀레산이라고 해서 아토피나 피부염 개선 등에 효과 있는 효소들이 가득 들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쌀눈으로 만든 각종 건강식품과 기발한 제품들이 인기였다. 피부 트러블이 있는 여성들을 위해서 개발된 쌀눈 비누나 쌀눈 스타킹 등이 바로 그런 것들.


   그렇게 취재를 하면서 틈틈이 나고야 주변을 여행 삼아 돌아다닐 때 일이다. 나고야에는 도요타 공장이 있어서 12시가 되면 공장 노동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러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때 한 가지 신기한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점심 식사를 하는 일본인들의 풍경이었다.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라서인지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이미 자리는 만석이었다. 간신히 구석진 자리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분위기가 썰렁했다. 식당 안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우리 같으면 점심시간 식당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였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각각의 테이블에는 도서관이나 독서실처럼 칸막이까지 세워져 있어서 옆자리 사람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묵묵히 혼자서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나고야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이동했을 때도 역시 그런 문화는 곳곳에서 발견됐다. 물론 칸막이가 쳐진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혼자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계산을 하고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겐 참 희한한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10여 년 전 일본에서 본 그 혼자서 밥 먹는 모습을 이제는 서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젠 혼자서 밥 먹는 게 어색하지도 않다. 예전 같으면 '혼자서 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겠다'는 사람들도 요즘엔 남 눈치 보지 않고 혼자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다. 분명 혼자서 생활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몰려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 이런 혼자서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발달하는 것에 일단 환영이다.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집단보다는 개인의 역할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역량, 개인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문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집단이나 공동체를 강조하는 문화는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어야 했고, 대량 소비를 통해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문제는 시대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고도화된 지식정보 사회로 진입한 나라들의 경우에 혼자서 하는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추세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젠 혼자서 생산하고 혼자서 즐기는 일상의 문화가 대세가 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혼자서 생활하는 문화가 늘어나면서 외로움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나이 든 세대들에 나타나는 외로움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생존과도 직결되는 절박함이 있다. 2,30대의 외로움이 사랑하는 사람, 친구로부터 소원해지는 지극히 감성적인 외로움이라면, 노년의 외로움에는 이런 감성적 외로움에 더해서 실존적 외로움이 겹쳐진다. 훨씬 그 깊이깊고 때로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다. 어떤 면에서는 직장이나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까지도 들게 만드는 비정한 외로움일 수도 있다. 때문에 이런 외로움이 만들어지는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외로움에도 나이가 있고, 혼자 사는 문화에도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결국 노년의 외로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며 그 구조적 한계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의 심각성을 체험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이런 노년의 외로움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의 부당함을 고발하거나 아예 그런 외로움 따위를 걷어차고 스스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작품도 많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나 <오베라는 남자>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화의 배경이란 게 참 신기하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경우에는 공교롭게도 노년의 에피소드가 '섹슈얼리티'와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주목받았던 실버 콘테츠들을 가만히 들여다봐도 잘 알 수 있다. 70대 노시인과 17살 여고생의 파격적인 로맨스를 그린 <은교>나 일흔이 되든 여든이 되든 변하지 않는 연인에 대한 욕망을 담은 <야관문>도 그렇다. 심지어 <죽어도 좋아> 같은 다큐멘터리가 흥행을 했던 요인 중에도 섹슈얼리티를 빼놓을 수 없다. 나이 든 사람들에 대한 성적 편견이 여전히 관음증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나이 듦을 성적인 욕망이 희석시키는 묘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뭐가 됐든 참 역설적인 상황이다.


   얼마 전에는 <스틸 라이프>라는 영국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심지어 그 영화에서는 장례식도 혼자서 치러야 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고 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쓸쓸한 장례식, 죽음조차도 외롭다. 그렇게 외로운 사람들의 쓸쓸한 마지막 순간을 위해 런던의 골목길을 헤매는 구청 공무원 존 메이가 주인공이다. 그의 하루 일과는 외로운 죽음들의 현장들을 찾아 마지막 유품들을 정리하고 가족들이 했어야 할 마지막 인생의 뒷정리를 대신하는 역할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가족들이 돌봐주지 않아서 혼자서 생을 마감하는 노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비록 국내에서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2013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비롯해서 4개 부문이나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고독사'라는 죽음을 소재로 했지만 영화는 그렇게 외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존 메이의 따듯한 마음씨가 시종일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 느끼게 되지만, 모든 죽음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노년의 외로운 죽음에는 이유조차 없다. 그냥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텅 빈 장례식 장에는 찬송가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지상에서의 보내는 마지막 순간, 죽은 자를 기리는 짧은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땅속 무덤으로 혹은 재가 되어 세상을 떠난다. 누구나 죽는 것이지만, 이렇게 외롭게 죽어도 되는 걸까?


일개 구청 공무원인 존 메이에게 그건 부당함이고 모순이다. 그래서 그는 강제퇴직당하는 마지막 날까지도 죽은 자를 위해 살아 있는 자들을 찾아 나선다. 과장된 감정 하나 개입되지 않았지만, 난 존 메이 옆을 따라가며 그의 등이라도 밀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스틸 라이프>가 가슴 절절하게 다가온 이유는 바로 그런 극단까지 치달은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달래주려는 한 중년 남자의 진솔한 인간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외롭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외로움에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변명조차도 사치스럽다. '내가 언제 그렇게 외로운 존재로 전락할 걸 알았을까', 누구나 그런 변명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시간을 이길 순 없는 법.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은교>보다는 <스틸 라이프> 같은 영화가 좋다. 가슴이 뻥 뚫린 허전함에 몸서리 쳐지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외롭게 산 사람들의 외롭지 않은 장례식을 위해 분투하는 존 메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일종의 신문지에 싸인 선물을 받는 기분과도 같다. 실제로 예전엔 신문지로 떡을 담아 옆집에 보내기도 했다. 아무리 비싼 포장지라도 그 안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걸 받는 것보다는 그런 이웃의 정이 담긴 떡 한 조각에 마음은 따듯해진다. 영화는 그런 분위기다. 화려하진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손으로 정성스레 써 내려간 마음의 편지를 죽기 직전에 받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섹슈얼리티가 됐든 혼밥, 혼술이 됐든 뭐든 혼자서 해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 혼자서 하는 삶을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삶의 '아노미'(anomie)에 빠질지 모른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혼자서 외로운 오솔길을 걸어가야 할 각오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건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용감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결혼도 혼자서?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글: 김덕영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와인과 인문학' (밴드) http://band.us/@kim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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