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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pr 12. 2017

세 개의 그리스

이슬람 속 고대 그리스, 에게 해 바다의 왕국, 신화의 땅 본토 그리스

   '김PD의 인문학 여행' (43)


   그리스에는 세 개의 그리스가 있다. 아잔이 울려퍼지는 이슬람의 땅 터키 속 그리스가 그 첫번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터키의 서부 해안 도시들에 자신들의 터전을 잡았다. 이오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던 그 지역은 한때 동방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돈이 쌓이고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지식과 문화도 발전하는 법. 서양철학사의 맨 앞 장을 차지하는 이오니아 자연주의 철학은 이런 부와 지식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밀레토스, 에페소스, 페르가몬이 바로 그 중심 도시들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들이 현존하고 있다. 돌무더기 사이로 고대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에개 해는 두 번째 그리스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맑고 푸른 바다 위에 흩뿌려진 그리스의 작은 섬들. 이 작은 섬들마다 고유한 문화가 있고 전설이 숨겨져 있다. 그 유명한 관광지 산토리니에는 아름다운 석양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산이 분화해서 만들어진 산토리니 섬 한 가운데는 기원전 9세기에 생성된 고대의 도시 티라 유적지가 남아 있다. 해양국가로 발돋움하려는 고대 아테네의 보물 창고 델로스 섬에는 바람에 형체가 뭉그러진 사자상들이 관광객들을 맨 처음 맞이한다. 둥그런 원형처럼 모여 있다 해서 붙여진 키클라데스 군도에는 3,000개 이상의 섬들이 모여 있다. 시간조차 쉬어가는 작은 섬 미코노스에서는 일상이 고요하다.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돌 때마다 마주치는 형형색색의 작은 집들을 구경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동방으로부터 진격하는 페르시아와의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그리스는 단 한 번도 바다에서 진 적이 없다. 역시 바다의 나라답다. 그리스의 해군을 키운 건 바로 에개 해의 3,000개 섬들이 아니었을까. 


   아테네, 스파르타, 델피, 코린토스, 미케네, 그리스 본토는 온 땅에 신화가 스며들어 있다. 도시를 지배하는 제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도시 국가 그리스의 운명이었다. 다양성과 개성이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델피의 신탁에서 신성함을 얻었다면, 올림피아는 건강한 시민들의 축제였다. 명예와 가치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그들에게는 공동체의 이상이 살아숨쉰다. 그것이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의 문명이 지니는 본질이다. 


“따라서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자이다.
신화는 놀라운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나에게 세 개의 그리스를 탐험하는 여행은 일종의 ‘시간 여행’이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해서 에게 해에 인접한 서부 해안 도시들을 훑고, 다시 그리스 섬들로 이동, 결국엔 아테네, 미케네, 델피를 거쳤다. 친다. 지도 상으로 보자면 아시아 땅과 유럽 땅을 넘나드는 셈이다. 흔한 관광지 하나 제대로 보지 않고 무작정 고대 그리스를 기억하고 있을 돌더미들만을 여행했다. 돌에는 시간의 기억이 있다. 어느 곳이나 신화의 돌에는 지혜가 간직되어 있다.    


   그리스 경제만 놓고 본다면, 이런 돌무더기 유적지들에서 국민총생산(GDP)의 20%가 생산되고 있다. ‘이 유적지들이 그리스를 먹여 살리고 있군…’ 입에서 저절로 이런 말이 튀어 나온다. 조상 잘 둔 덕에 그동안 그리스 사람들 참 편하게도 먹고 살았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런 안일함이 지금의 그리스 경제의 위기를 불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라 살림의 1/5이나 되는 부분을 수천 년부터 버티고 서있던 돌덩이들에게 의존했다는 건 아무래도 나태와 안일함으로 이어지는 원인일 수 있다. 인간은 늘 뭔가 부족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부족함이 없는 삶에서 새로운 창조란 요원한 일이다. 그리스 경제의 위기에는 역설적이게도 풍요로운 유산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신화의 돌덩이들을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고대 그리스 신화 만큼 독보적인 베스트셀러가 또 있을까. 특히 유럽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신문명이 시작된 성소와도 같은 곳이다. 그런데 역사란 묘하다. 고대 그리스 유적지들 중 상당 수가 이슬람의 나라 터키에 존재하고 있다. 묘한 긴장감을 자극한다. 그래서 그들은 황량한 벌판에 덜렁 남겨진 돌기둥 몇 개, 흔적만 남은 성벽의 폐허라도 기어이 올라가려 한다. 그것이 유럽의 돌덩이 여행자들이 지니는 정신이다. 과거에서 지혜를 얻으려는 노력을 현재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신의 문명이 황폐할수록 고대의 정신 문명에서 유산을 찾으려 한다. 적어도 그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대결을 펼쳤던 고대 그리스 최대의 격전지 트로이, ‘이오니아 리그(Ionian League)'라 불리는 터키 서부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들에서 최초로 인간은 철학적인 물음을 세상에 던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인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분명 이전과는 질문의 출발점이 달랐다. 게다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끊임없는 사랑과 전쟁의 이야기들이 그 돌덩이 속에 새겨졌다. 로마제국의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사랑을 속삭이며 걸었던 에페소스의 밤거리, 그들이 걷던 거리에는 횃불로 불을 밝힌 가로등 돌기둥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왠지 낭만적이다. 그 밤에 고대 원형극장에서는 비극적인 고대의 뮤지컬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전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잔인해 진다. 뺏고 뺏기는 십자군 기사와 이슬람 전사들의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던 로도스 섬에는 아직도 전쟁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오스만 투르크, 다시 현재까지 주인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돌덩이들이다. 터키 안에만 줄잡아 3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고대 그리스의 유산들을 간직하고 있다. 아테네의 상징 파르테논 신전처럼 생긴 석조건물들이 아직도 30여 군데나 남아있다는 뜻이다. 


   뮤지컬과 영화로 흥행에 성공했던 ‘맘마미아’의 로케이션 장소였던 에게 해의 산토리니 섬은 전 세계에서 하룻밤 낭만적인 꿈을 경험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요즘에는 아예 결혼식 이벤트로 섬 전체에서 웨딩마치가 멈추지 않는다. 화산이 분출된 가파른 암반 절벽 위에 희고 푸른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것이 산토리니의 상징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올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관광지 산토리에도 신화가 존재한다. 플라톤은 산토리니를 사라진 아틀란티스 제국이라 불렀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던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크레테 섬에는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얽힌 전설들이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델로스, 낙소스, 파로스, 이름만 들어도 신화를 연상시키는 에게 해 그리스의 섬들을 거쳐, 아테네, 코린토스, 미케네, 델피의 신탁까지 그리스 본토 곳곳이 신화의 땅으로 가득하다. 오늘날의 과학은 그 신화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신화의 돌은 곧 역사를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와 전설에 열광하면서 언제가 한번은 이곳에 여행을 오리라 마음 먹는다. 신화가 상상이 되고, 상상이 다시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팍팍한 인생 살이를 적셔주는 촉촉한 단비다. 상상 속 신화가 현실이 되고, 역사적 현장이 될 때 그곳은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여행지가 된다. 그들은 폐허와 잔해만 남은 돌더미 속에서 역사의 진실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여행을 통해 삶이 변화한다. 실제로 독일의 고고학 애호가 슐레이만은 전 재산을 트로이 성 발굴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임을 입증했다. 그가 트로이의 폐허 속에 뭍힌 돌덩이를 세상에 꺼내는 순간 신화는 역사로 바뀌었다. 내가 여행을 시작한 것도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영웅들의 숨결이 깃든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부서뜨리는 전복적인 가치들, 이것이 신화의 힘일 것이다. 나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작가)



'세 개의 그리스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이번에 강연을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오히려 그때부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다간 30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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