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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pr 01. 2017

싫은것, 다른것, 틀린것

'나는 생활의 감정을 명확히 구분하고 싶다'

'김PD의 인문학 여행' (42)


지금은 별로 인기가 없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서부 영화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다. 최근 헐리우드에서도 서부 영화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팬들을 위해서 요즘도 가끔씩 몇 편씩 제작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서부 영화의 정통을 좇는 명작들은 1950~60년대에 탄생했다. 그때가 서부 영화의 전성기였다.


총질과는 거리가 먼, 어쩌면 목사 님 같은 인생을 살 것 같이 생긴 <쉐인>의 주인공이 악당들을 물리치고 록키 산맥을 향해 쓸쓸하게 걸어가는 장면이라든가, 호주에 가서 살자는 마지막 약속을 남기고 수백 명의 볼리비아 경찰들 총구를 향해 달려가던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와 부치의 마지막 장면 등은 아직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나에게 서부 영화 하면 역시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판초 우의를 입고 시가리아를 질겅질겅 씹어대며 등장하는 <석양의 무법자> 시리즈가 최고다. 무엇보다 원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The Good, The Bad, The Ugly>, '좋은놈, 나쁜놈, 추한놈'이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세상사를 압축한 느낌이다.


세상엔 '나쁜놈'이 있고 '좋은놈'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에겐 '추한놈'을 하나 더 추가해서 정글 같은 세상을 더 입체화시켰다. 물론 누가 좋고, 나쁘고, 추한 것인지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좋고 나쁨 역시 나를 기준으로 늘 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이렇듯 윤리의 세상은 늘 기준이 '나'를 중심으로 재편되므로 정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문화와 전통, 역사의 프리즘에 따라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판단도 달라지는 이치다. 하지만 인식론이나 존재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좋고 싫음의 차원이 아니라 옳고 그름 영역으로 이동한다.


가치가 중심이 되는 윤리의 영역과 달리 존재와 인식의 영역에선 역시 '논리'가 핵심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믿고 싶다. 학자나 이론에 따라 물론 입장은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오늘 아침 나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도대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나는 어떻게 그걸 확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거창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철학적인 질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봤다.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야말로 이 거대한 상대성의 세계 속에서 작은 진리라도 하나 건질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서부 영화가 떠올랐던 것 같다. 일종의 내 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앞서 언급한 서부 영화 <석양의 무법자>에 등장하는 '놈놈놈'을 대입시켜 보자. 그곳엔 'The Good'(좋은놈)'이 있고 그와 반대되는 'The Bad(나쁜놈)'이 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며 비열한 짓을 일삼는 '추한놈(The Ugly)'이 존재한다. 비겁하기도 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다. 사실 나를 비롯해서 우리 안에 가장 많이 존재하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늘 야수처럼 할퀴는 억제되지 않은 충동과 욕망이다. 나쁜놈이 원래 사악한 심성을 지닌 결정된 존재라면, 추한놈은 선과 악이 교차하는 존재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인간적인 존재다.


'나'를 중심으로 보면 세상 모든 일들은 '좋은것'과 '나쁜것', 그리고 중간에 덩어리가 아주 큰 '불확실한것'으로 나눠져 있다. 쉽게 말해서 뭐가 되든 나에게 '좋은것'과 그 반대되는 것들로 대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좋은것'이야 뭐가 됐든 좋은 것이니 일단 문제 삼지 않기로 하자. '나쁜것'도 선과 악의 문제처럼 규정짓기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이 '좋은것'과 '나쁜것'의 사이에 있는 '불확실한것'들이다. 일단 실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간단히 세 가지로 압축해 보자. '싫은것', '다른것', 그리고 '틀린것'. 중요한 건 이 세 가지를 제대로 구분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점이다. 때로는 세 가지 분명히 다른 개념을 혼재해서 사용하고 있다. 나와 '다른것'이라서 해서 나에게 '틀린것'은 아닐진대 말이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것'을 '싫은것'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틀린것'을 '나쁜것'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다르다고 싫은 것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게 다르고 싫어지면 결국 틀린 것이 되는 것인가?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싫은것'과 '다른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고, 싫고 다르다 해서 '틀렸다'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싫은것'과 '다른것', 그리고 '틀린것'을 제대로 구분할 줄 하는 삶이야말로 성숙한 삶으로 향하는 첫 단계가 된다.


이 '싫은것', '다른것', '틀린것'의 세 가지 감정이 가장 거침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현장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다.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싸움이 되고, 국가간의 정치적 대립은 곧 전쟁까지 불사하게 된다. 전쟁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늘 싸워 왔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바로 이 '싫은것'과 '다른것', '틀린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서 문제가 생겼다. 나와 다른 이념과 종교를 가졌다는 바로 그 '다른것'이 곧바로 '싫은것'이 되어버리고 결국은 '틀린것'으로 규정된다. 나와 다른 것이 싫다는 감정만큼 폭력적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관용(torelance)이란 결국 이 '다른것'에 대한 포용에서 시작된다. 나와 다른 것을 싫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건 자연발생적인 감정이 아니다. 야만에 포용이 있을까. 노력이 따르고 때로는 대가도 따른다. 그렇기에 문명화된 존재는 의식화된 존재다. 자기감정대로 움직이기보다는 논리에 따르고 원칙을 고수하려고 노력한다. 희생과 대가가 따르더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싫은것', '다른것', 그리고 '틀린것'을 제대로 구불할 줄 아는 지혜, 그런 지혜로운 사람들이 주변에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 작가)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김덕영 지음 (책세상),  2017년 신판이 새로 나왔습니다. 어려운 출판계 상황을 고려하면 요즘 3판 찍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감사드립니다.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주문이 줄어들고 있지 않은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하지만 아쉽지만 이번 판을 마지막으로 절판됩니다. 앞으로는 전자책(ebook)으로만...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중국어판. 대만에서 대박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자의 꾸준한 관심을 얻어가고 있다고 하네요. 2판 인쇄 들어간다고 합니다.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이번에 새로 전자책으로 제작하면서 표지를 바꿨습니다. 이 소설은 언젠가 꼭 연극이나 영화로 제작하고 싶습니다.  


서촌 골목길 까페 '통의동 스토리' 3년의 기록.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말이 되는 방식으로 가게를 꾸려 온 김PD의 체험 삶의 현장, 그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tel: 070-898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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