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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Mar 30. 2017

일상의 작고 소소한 발견

<까페 에세이> (2) 

   일본 속담에 '차가운 돌 위에 삼 년'이라는 말이 있다. 차가운 돌 위에 앉아서 삼 년을 버티면 돌도 따듯하게 된다는 뜻으로 지극히 일본인다운 속담이다. 개인적으로 이 속담을 좋아하는데, 그건 그냥 조용히 자기 분야에서 묵묵하게 노력하는 장인의 모습이 늘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실속없이 큰소리로 떠드는 것과는 아무래도 모양새가 다르다. 

   서촌에 온 지 3년, 그렇게 통의동 작은 골목길에서 까페를 운영했다. 그들 식으로 치면 나도 '차가운 돌 위에 삼 년'이다. 당연히 뭔가 하나라도 배운 게 있고 느낀 것들도 많을 터.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평생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은 해본 것도 없다. 그런 내가 까페와 와인바를 겸하는 가게를 연다고 했을 때 다들 놀랐다. '장사는 아무나 하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지만, 아마 속으로는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입들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의 인적이 드문 통의동 골목길이라니...... 

   사실 서촌의 통의동 골목길은 내가 가게 문을 열기 전부터 나와 인연이 있었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나는 그때 '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취재하고 있었다. 바로 가게 앞 작은 골목길들이 로케이션 촬영 현장이었다. 지금 '통의동 스토리'가 자리 잡은 바로 그곳,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들 사이로 카메라를 들고 매일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인연이 또 한 번의 인연으로 이어진 셈이다. 구불구불 돌아가면 어딘가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골목길들처럼.  

   가게를 3년 하면서 생활도 당연히 바뀌었다. 생활 리듬도, 낮과 밤도, 만나는 사람도 변했다. 아무래도 다큐멘터리 만들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때와는 같을 수가 없는 구조다. 그때는 대부분 내 쪽이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남이 이뤄졌다. 하지만 까페에선 정반대다. 내가 가기보다는 그들이 내 쪽으로 오는 경우들이다. 목적도 다양하다. 다큐멘터리를 할 때는 오로지 목적은 하나. 남이 모르는 그 뭔가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불퇴전(?)의 각오 같은 게 숨어 있다. 그땐 왜 그렇게 무모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도 많다.  

   숫자로 따지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만남의 형태는 180도 다르다. 전적으로 주체는 그들이지 내가 아니다. 취재를 하고 다닐 때가 원심력이 작용하듯 빙글빙글 '나'라는 작은 점으로부터 끊임없이 밖으로 회전하는 운동력이라면 가게는 정반대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게 안으로 모여드는 구심력의 모양새를 띤다. 시간도 물론 정해져 있지 않다. 다큐멘터리 취재를 할 때는 적어도 약속 시간이라도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 가게 안에서 손님을 만날 때, 정확히는 손님을 맞이할 때는 시간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그들이 정하는 순서에 따라 나의 스케줄도 맞춰진다. 처음에 이 낯선 관계의 구조에 적응하느라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이 가게를 중심으로 맺어지는 손님과 주인의 운명 같은 것이라 여겼다. 

   불편한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재밌고 뜻깊은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다. 원심력과 구심력은 힘의 작용은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하지만 어쨌든 끊임없이 뭔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닮은꼴이다. 나는 정체되는 걸 지극히 싫어하는 성격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변화하는 일상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말했던 바로 그 '일상'의 행복이 주는 작은 재미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슨 사연이라도 간직한 표정으로 가게 안을 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작은 일상이 주는 재미 중 하나였다. 때로는 몇 달, 혹은 1년이 넘게 다시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조금은 어색하지만 반가운 표정들과도 마주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비록 카메라는 없지만 그들은 작은 촛불 하나를 밝히며 각자의 고민과 아픔을 털어놓는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남에게 말하지 못했던 고민과 갈등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그 이야기들에는 각자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있다. 그걸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숙연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건 카메라 앞에서 누군가와 인터뷰를 할 때도 그랬다.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행복. 적어도 이것만큼은 신에게 정말 감사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일상의 작고 소소한 발견에 주목하게 됐는가? 그것이 오늘의 주제다. 분명 거대한 담론을 즐기던 나에게 이건 3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변화다. 큰 이야기들, 큰 목소리에 익숙했던 내가 작은 이야기들로 주목하게 된 것에는 아마 통의동 골목길에 자리 잡은 내 가게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화제를 좀 바꿔서 한창 정치적 이슈와 같은 거대 담론에 주목하면서 취재를 할 때 얘기다. 나는 일본 NHK에서 한 달 가까이 작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1998년, IMF 체제가 시작되면서 대기업들의 정리해고가 본격화되어가던 시점이었다. 나는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과정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했다. 8개월 넘는 과정을 취재했고 그 결과물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방송이 됐다. 한국에서의 정리해고 과정에 주목하던 일본 NHK는 내가 취재한 결과물을 재편집해서 NHK 채널을 통해서 방송했다. 덕분에 나는 NHK 프로듀서들과 한 달 가까이 공동작업을 하는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 

   시부야의 휘황찬란한 조명불 아래 일본 역시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 여겼던 도쿄의 집값이 붕괴되고 은행 금리가 제로로 근접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은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 '프리타'라는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며 부모의 눈총을 받았다. 그런 일본의 어두운 그늘 아래 NHK 방송국을 내 집처럼 매일 드나들었으니 그건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적어도 저널리스트로서 나에겐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아주 특별한 순간들이었다. 

   일본 제작진들의 눈에는 내가 촬영한 수백 개의 촬영 원본들이 무슨 신기한 물건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수천 명이 운집한 집회, 거리 시위, 주택가를 울리는 노조의 확성기 소리까지 모든 게 그들과 달랐다. 내가 숙소로 묶었던 고탄다에서 NHK가 있는 시부야까지 전철을 타고 매일 아침 출퇴근을 하면서 나는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가 이렇게 조용한 곳인지 처음 깨달았다. 물론 시부야 같은 번화가를 예외로 한 말이다. 적막하고 고즈넉한 아침이 도쿄의 작은 골목들 사이에 느껴졌다. 이런 조용한 아침이 도쿄 한가운데에서 매일 반복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일이었다. 간밤에 억수같이 비가 내린 탓에 거리는 한결 더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도쿄 순환 전철 야마노테센을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도쿄의 아침이 상쾌하기만 했다. 나는 문득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 졌다. 어느 역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무작정 지하철에서 내렸다. 시부야까지는 아직 적어도 몇 킬로미터는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언제 이런 걸 해보겠어?!' 때로는 순간의 용감한 선택도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일상의 틀을 깨고 시부야에 있는 NHK 편집실까지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날 숙소에서 일찍 출발한 탓에 시간도 한 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얼마가 됐든 비가 갠 도쿄의 상쾌한 아침 거리를 걸어보리라, 그런 객기가 나를 움직였다. 

   오늘날 도시에서 걷는다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건축적인 요소다. 자동차를 멀리하고 자전거나 보행을 중심으로 도시가 디자인되는 것은 이미 서구 사회에서는 오래된 트렌드이기도 하다. 파리, 뉴욕, 런던, 암스테르담 같은 세계적인 도시들이 각광을 받는 이유는 바로 거리가 걷기에 편하고 걷는 즐거움이 있다는 점에 있다. 도쿄 역시 그랬다. 아침에 문을 연 까페와 빵집들에서 풍기는 은은한 커피향과 버터가 구워진 입맛 도는 빵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꽃집을 지날 때는 상큼한 꽃 내음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은 사실 국가나 시청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 바로 작고 소소한 일상에 있다. 그런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행정구역으로 표시된 지도 위에선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빵집, 까페, 꽃집들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각자의 행복이 있다. 그걸 지키는 것도 그들 각자의 몫이다. 국가는, 시청은 그들이 할 수 있도록 묵묵히 바탕이 될 뿐이다. 도시가 활력 있는 작은 세포들로 움직일 때 그곳을 찾는 사람들 역시 활기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겐 책임도 있다.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원칙이 있다. 


도쿄의 어느 길에서 만났던 여자아이들의 기억

   시부야를 향해 걷던 순간이었다. 한 시간 넘게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라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들 대여섯 명이 길 한가운데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무슨 땅따먹기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십여 미터 앞에서부터 그 여자애들의 행동이 궁금했다. 사람들이 옆으로 스쳐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아이들은 계속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 가는 방향은 달르지만 가보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발걸음을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바꿨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리로 다가가면서 호기심도 커졌다. 드디어 코 앞에 아이들 정수리가 보였다. 검은 머리 아이들 사이로 고개를 빼서 들여다봤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날의 경험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하고 있던 것은 도쿄의 상큼한 아침 기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개똥을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옆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키우고 있던 온 강아지였다. 그 강아지가 예정에도 없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 복판에 그만 실례를 한 것이다. 아이들은 강아지가 싸놓은 배설물을 비닐봉지에 담고 있는 중이었다. 한두 명은 가방에서 크리넥스 몇 장을 꺼내서 땅바닥에 묻은 개똥 자국까지 닦고 있었다. 이 정도 되면 나에겐 충격이라고 말해도 될 듯한 일이다. 

   물론 요즘 우리도 길거리에서 개똥을 싸고 그냥 가면 벌금을 물게 되어 있다. 벌금 무는 게 싫어서 열심히 개똥을 치우고 있었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별거 아닌 일이라 말하면 뭐 나도 할 말은 없다. 사실 그때는 나도 별거 아니라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도 내 기억 속의 서랍 한 켠에 들어 있던 그날의 기억은 불쑥불쑥 떠올랐다. 마치 서랍이 열리면서 잡동사니들 사이로 잊고 있던 물건 하나가 튀어나오듯 말이다. 

   적어도 그날의 개똥 사건은 나에게 일상의 작고 소소한 일들이 갖고 있는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남들의 눈에는 아주 작은 행동일 수 있지만, 그 여자아이들의 눈에는 당연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느 누군가는 길 한복판을 걷다가 개똥 때문에 기분이 망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도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개똥을 자신들의 손으로 치우는 행동으로 나서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열서너 살 여자아이들치고는 참 기특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비가 갠 도쿄의 아침은 그 아이들 덕분에 더 상쾌해졌다. 

   일상의 작은 행복, 어쩌면 통의동 작은 골목길에서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그건 획일적인 기준에 맞춰 모난 것들을 두들겨 집어넣는 일 따위와도 많이 다르다. 알록달록한 개성들이 살아 숨 쉬는 거리를 만나고 싶다. 작은 골목길에는 그런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가게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이 내가 꿈꾸는 일상의 작은 소소함과 즐거움이 있는 골목길 풍경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작가)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 김덕영, 그가 쓴 책들...
'뒤늦게 발동걸린 사랑이야기'. 가슴 절절한 중년들의 사랑이야기. 당신은 지금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오히려 그때부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다간 30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자신만의 스토리와 콘텐츠로 단골을 만들어라! "왜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만 살아남으려 하는가?" 인적도 드문 서촌 골목길에서 3년을 살아 남은 한 까페 이야기

지난 3월 25일,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는 아주 특별한 콘서트가 있었다. 일명 '서강 현우회 살롱 음악회'라 이름 붙여진 중년 남자들의 클래식 기타 연주회였다. 삶이 조금은 버거울 나이, 하지만 그들에겐 음악이 있었고 낭만이 살아 있었다. 그날 공연 뒤풀이 때 찍은 '고향의 봄'은 왠지 모르게 자꾸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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