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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pr 25. 2017

‘3개의 그리스를 만나다’ (제1편)

터키 속의 고대 그리스 

'김PD의 인문학 여행' (45)


철학의 시원을 찾아 떠난 여행, 그 출발은 이스탄불에서 시작되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나의 여행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철학을 전공한 나에게 고대 그리스 철학은 특별했다. 무엇보다 인류의 지성사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만큼 나에게 인생의 교훈을 준 사람들도 없었다. 특히 이오니아 지역 Ionian League, 지금은 터키의 서부 해안 도시들에서 탄생했던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은 서양 철학사의 맨 앞 장을 수놓은 말 그대로 '철학의 시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내가 보기엔 '질문'이 달랐다. 어느 시대에나 지식과 학문은 있었다. 고대 그리스보다 더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아시아의 인도나 중국까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다만 그들이 지식을 탐구하고 축적시킨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는 차이가 있다. 철저하게 왕권의 강화에 복무했던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지식과 학문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당시 고대 이오니아에서는 새로운 질문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것은 '세상은 무엇으로 이뤄졌고, 도대체 그속에서 나는 왜 살고 있는가?'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질문이었다. 질문이 다르니 답을 찾는 과정도 달랐고, 결국 새로운 형태의 지식이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 지식 그 자체를 탐구하려는 호기심이 생겨난 것이다. 철학(Philosophy)적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인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분명 이전과는 질문의 출발점이 달랐다.


   그들에게 지식과 학문은 일상에서 진실한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공허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실재하는 사물과 자연현상에서 궁극적인 본질을 찾았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대략 기원전 5,6백 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지성적 활동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까지도 그 옛날의 도시들이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나에겐 이 두 가지가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 거리였다.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질문들, 그리고 철학의 출발이 되었던 역사의 현장들. 결국 나의 여정은 고대 그리스의 돌덩어리들을 탐험하는 시간여행이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서 에게 해에 인접한 터키의 서부 해안 도시들을 훑고, 그리스의 섬들로 이동해 아테네, 미케네, 델피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여정. 지도상으로 보자면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드는 여행이었다. 

   


   밀레투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도시들은 위치상으로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무역의 거점이었다. 일찍부터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과 아프리카 문명과 유럽의 문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분위기 도시 곳곳을 지배했다. 무역이 발달하고 경제가 융성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식인, 예술가들도 몰려들었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자유롭게 뒤섞이는 고대의 코스모폴리탄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영국의 거스리(W. K. C. Guthrie)는 고대 이오니아 지역에서 나타난 이러한 지성적 변화를 'unity in differences', 즉 '다양성 속의 일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변화하는 자연과 사물들 속에서 하나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의 학자들이 나일 강의 범람으로 수학과 기하학을 발전시킨 것과는 양상이 달랐다. 이집트의 학자들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오직 절대 권력에 대한 봉사였다. 그에 비하면 이오니아의 학자들은 훨씬 자유로운 사상가들이었다. 


   물을 통해 세상의 근원에 접근하려 했던 탈레스만 봐도 당시로서는 얼마나 급진적인 사상가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가 살던 시대엔 신화가 자연현상을 지배했다. 자연 재해란 곧 신의 분노였다. 그런 세상에서 세상의 원리를 물로 설명하려 했던 탈레스의 사상은 미신의 영역을 벗어나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옮겨놓았다. 심지어 '무한자'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다. '공기'를 만물의 근원이라 여겼던 아낙시메네스에 이르러서는 과학적인 가설들로 자리를 잡아갔다. '흐르는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명제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가 세상을 이해하는 원리가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변화란 두려움이었다. 변화를 자연의 일부로 인정하자, 정신의 영역에서도 여유가 생겼다. 지진이나 해일, 거대한 폭풍우와 화산 폭발 같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신화의 주인공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신화의 빈자리를 과학적 가설과 논증이 메꾸어가면서 지식과 학문이 발전했다. 인류가 철학사의 맨 앞장에 이오니아를 허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의 현장들이 지금도 터키 땅 곳곳에 존재한다. 페르가몬의 유적지에서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그대로 본 뜬 거대한 도시 국가의 유적들이 잔존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이 신의 계시를 기다리던 델피에 맞먹은 거대한 규모의 아폴론 신전이 옛모습 그래도 존재하는 디디마도 있다.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가 서로 다정하게 연극을 관람하고 밤길을 산책했다는 에페소스의 아르가디안 거리엔 지금도 횃불을 밝혔던 돌기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에겐 이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 호기심 하나만으로도 고대 그리스의 돌무더기 사이를 여행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신화가 역사가 되는 바로 그 현장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돌무더기 여행의 목적이었다. 


   원래 역사(history)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이스토레오 istoreo'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는 캐묻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구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섞여 있다. '알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오이다 oida'의 완료형 시제와 '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비데레 videre'란 단어다. 우리가 요즘 쓰고 있는 'video'라는 단어에는 이처럼 '보고 알다'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결국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보는 것이 아는 것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였다. 


   나는 이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보지 않고 믿어야 했던 신화의 시대를 뛰어넘는 과학적 가설의 시대로 진입하겠다는 욕망. 그것이 곧 나의 여행의 목적이었다. 나는 고대 그리스를 통해서 '3가지' 서로 다른 그리스를 발견했다. 그중에서 첫 번째, 그것은 바로 눈으로 보지 않고선 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저한 합리적 세계관이었다. 


   터키 속의 그리스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보드룸을 선택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고향이었다. 그는 이오니아의 도시들을 출발해서 페르시아와 아프리카 일대를 여행하며 직접 보고 기록해놓은 자료를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썼다. 그 책의 이름도 바로 '역사'(history)였다. 우리가 '역사'라는 단어에서 캐캐묵은 과거의 흔적만을 떠올린다면, 적어도 헤로도토스에겐 해당되지 않는 개념이다. 그는 이 '역사'를 쓰기 위해서 맨몸으로 평생 세상을 여행했다. 그에겐 언제나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그에겐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글로 기록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신념이 고대 그리스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을까. 찬란했던 문명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두 번째 그리스를 찾기 위한 여행을 계속했다. (다음 편에 계속...)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고향 보드룸(Bodrum)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 작가)




현재 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4월 29일(토) 7시 30분, '3개의 그리스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저자 강연도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오세요. 장소: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tel:070-8987-0408


   

자신만의 스토리와 콘텐츠로 단골을 만들어라! "왜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만 살아남으려 하는가?" 인적도 드문 서촌 골목길에서 3년을 살아 남은 한 까페 이야기

   

'뒤늦게 발동걸린 사랑이야기'. 가슴 절절한 중년들의 사랑이야기. 당신은 지금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오히려 그때부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다간 30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3개의 그리스'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나의 고대 그리스 여행기,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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